외교를 통하여 남북조를 잘 견제해온 고구려였지만 6세기말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동시에 남쪽에 신라가 압박해온 상황에서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연결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왜와 손잡아서 이에 대응한다. 그러나 돌궐의 세력이 약화되자 불안해진 고구려는 수나라의
관계에 있었다.
5세기에 한반도 및 요동·만주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삼국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고(589),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수나라와 직접적인 외교관계
왜(倭)라고 불렀다. 4세기 초에 긴키 내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통일국가가 생겼다. 이후 야마토 정권은 기타규슈 시를 포함해 점차 지배권을 넓히기 시작했다. 6세기부터는 일본 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하였고, 7세기 쇼토쿠 태자는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하여 국내의 제반 체제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의 문제가 거론되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서기] 편찬시에 왜(倭)를 일본(日本)으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 ‘일본부’의 관련사실을 전하는 [일본서기] ‘긴메이기’에서조차 ‘일본’과 ‘왜’가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제와 신라, 가야의 고분은 흙벽으로 이루어진 토총이 대부분이어서 발견 사례도 적다. 그리고 벽화를 그렸었다 하더라도 남아 있지 않고, 그에 대한 역사적 자료도 거의 없으므로 무덤 속에 벽화를 즐겨 그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회화 작품으로 전거를 뚜렷하게 증명할 수 있는 우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