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추세로 보아 중간체제와 복합체제 및 절충체제 등을 전혀 일관하지 않고 양극적인 체제만은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는 중간, 중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좌’아니면 ‘우’라는 체제의 양극론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의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견수찬, 위의 글, p.15
일부 지역의 경우 2ㆍ8제나 소작료 불납이 여전히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3ㆍ7제 소작료 운동은 대부분의 농민대중에게 받아들여졌으며 3ㆍ7제 소작료 운동의 과정에서 농민조합의 결성 및 기존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이 진행되었다.
조선공산당이 농
조선노동당을 결성, 박헌영은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다수의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으므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더욱 직접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혁명정부가 일련의 선언 등을 통해 독립과 평화와 평등을 천명했으며, 실제로 민족해방운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의해 사회주의 이념으로의 경도는 가속화 되었다.
: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독립운동과 8.15해방 이후 신국가건설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적 이념은 다양하였지만, 학계에서는 크게 보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독립운동도 민족해방운동의 형태를 보였기에 ‘민족주의 vs 사회주의’가 아닌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구도로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