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박헌영의 생애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관련 활동
3.1 운동 후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 입당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
1922년 3월, 극동제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단 참여
1922년 4월,공청조직의 책임자로 국내파견
1924년 출소 후 신사상연구회 가
활동을 한 것으로 작품을 보면 조금은 알 수가 있다. 이 때의 작품을 보면 각각 볼세비키예술운동과 민족문학건설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월북작가였고 1980년대 후반까지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작품들이 금서가 되어서 그의 작품 분석이나 그에 대한 연구자체가 미흡했다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에 관한 책만 탐독했고 김남천·안막·한재덕·이북만 등과 함께 '무산자사'에서 활동했다. 1931년 귀국해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했으며, 그해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검거되었다가 9월경에 불기소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KAPF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되었고, 기관
박헌영과 함께 당 산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중심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고려공산청년회의 국제부책임자로 피선된 그는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 사이에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 발생하자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상해에서 조봉암은 김단야, 김찬 등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