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세기 말 동북 아시아 정세에 대한 개괄
19세기 말 동북아시아는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국가들과 충돌하며 혼란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서구 문명과 동양 문명의 충돌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수 천년 동안 동
우리나라는 분단 역사를 종식하는 역사적인 철도연결사업인 문산~장단간 12km의 철도와 도로의 연계를 위한 착공식을 거행하였고, 동해선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남북간 교류․협력이 지금까지의 “선언적 단계”에서 “실천적 단계”로 돌입했다는 것을 대 내외에 보여주었다. 경의선은 아시아 대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면서였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그 영향력이 줄면서 美,德 ,法 등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6개 나라의 영사관이 개설되고, 수 백개의 공장과 기업, 은행이 세워지면서 만주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러시아의 행보
√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강요
√ 러청동맹밀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한국·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
√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東淸鐵道)부설권을 획득
√ 러시아는 관둥저우[
동청철도의 철도기지가 된 이래 상업 교통도시로서 발전하였다.
길림성
면적은 18만 7400㎢이고, 인구는 2728만 명(2000)이다. 약칭은 지[길]이다. 남동부는 북한과 접한다. 지형은 동서로 산지가 있으며, 중앙부가 평원이다. 동부는 장백산맥으로 해발고도 1,000m를 넘으며, 주봉 백두산의 화구호 천지에서 제
동청철도의 보호를 명목으로 17만의 병력을 만주에 진주시켰다. 이에 만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양국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타협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 러시아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생각한 일본은 당시 즉각 동원 가능한 현지 해군력과 육군, 그리고 철도
동청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다.
3국 간섭 이래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던 일본은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권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
동청(東淸)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관동주의 조차권 까지 얻었다. 독일은 교주만(膠州灣), 영국은 구룡반도(九龍半島)와 위해위(威海衛), 프랑스는 광주만(廣州灣)을 교차하게 이르렀다. 99년에는 미국도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영국과 미국 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열강간의 대립
철도부설의 필요성이 부분적이나마 승인된 상황 하에서 과연 어느 부처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가 또 다른 핵심의제로 대두되었다. 1887년 6월 중앙정부 특별회의에서 철도부설에 관한 조사권은 해당 지역의 지사 겸 관구사령관에 일임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철도부설의 향방은 포시에트가
않을 것을 약정한다'는 내용
포츠머스 조약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
뤼순, 다롄의 조차권, 창춘 이남의 철도부설권을 일본에게 할양한다.
북위 50 ° 이남의 사할린 섬 남쪽을 일본에 할양한다.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에 있는 러시아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