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이 나타나는 시대·사회적 배경
(1) 국내적 배경
1910년대 간도, 연해주 지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한 한말국권회복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일제 침략이 가시화되던 1894년 의병전쟁의 태동과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는 그 한국독립운동
청년당(1918) : 김규식을 따라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연해주
- 블라디보스크에 신한촌 형성
- 권업회 조직(자치 기구),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미주
- 대한인 국민회(1910) : 미주 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단체로 성장
- 대조선 국민 군단 :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결성 -> 군사 훈련 실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무장독립전쟁을 수행
(3)독립운동기지
남만주의 삼원보(이희영, 이상룡)
밀산부의 한흥동(이상설, 이승희)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2.독립군의 항일전쟁- 3,1운동을 계기로 비폭력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
(1)독립군 부대의 활동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 습격
일본 군경과의 전투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토크)
·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만 명 거주.
·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약 18만명) 약 60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고려인의 역사
(2)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 1930년대 ‘스탈린 민족 정책’이라고 하는 새로운 규정성에 입각한 소련의 이
신한촌(新韓村)에서 회원 2,000명으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조직하였으며, 기관지 《한인시보》를 발행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를 대행할 상설의회,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할 선전부, 독립군 자금모금을 담당할 재무부,
신한촌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러시아 극동지방 행정구역
연해주를 향한 이주의 행렬은 1920년대 초반(1917 러시아혁명, 1917~1923 적백내전)에 더욱 두드러졌다. 1927년 경의 극동 지역 한인의 거주 규모는 자료 상에는 거의 17만명에 달하였는데 당시 극동지방의 총 인구가 180여만명에 달하였던 점, 1926~1927
독립운동
1. 장소
만주, 연해주(※3대 독립 운동 기지 : 삼원보, 한흥동, 신한촌)
2. 선구 단체
신민회
3. 활동목표
a. 경제적 토대 마련
b. 민족교육의 실시
c. 독립군 양성
4. 대한 광복군 정부의 수립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 최초의 임시정부
-무장독립 투쟁의 기반이 됨
항일독립운동
1.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ⅰ) 장소 : 만주, 연해주 (※3대 독립 운동 기지 : 삼원보, 한흥동, 신한촌)
ⅱ) 선구 단체 : 신민회
ⅲ) 활동목표 : a. 경제적 토대 마련 b. 민족교육의 실시 c. 독립군 양성
ⅳ) 대한 광복군 정부의 수립 :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 최초의 임시정부
1. 고구려 시대에 산성이 수행했던 역할을 설명해주세요.
고구려성은 입지에 따라 크게 평지성과 산성, 평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지성은 평지에 위치하여 가용면적이 넓고 수원 확보 면에서 산성에 비해유리하나 방어에 취약하여서 인근에 방어용 산성을 축조하여 세트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한인들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최초로 이주한 역사는 1863년이다. 그들은 왜 조국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하였을까. 과거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라에서도 백성들을 구제해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함경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방이었다. 중앙의 관심과 돌봄을 받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연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