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 확충에 기여한 많은 관료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정조시대 재상을 역임하며 많은 변화를 이끌어낸 채제공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당시의 상황과 그의 활동을 통한 역할을 생각하며, 당시 사회의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이 무엇이었는가를 채제공이라는 거울을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
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대의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 요약한 붕당관계도
훈구파(
채제공의 아들 채이숙이 노론 측의 고문으로 죽는다. 그리고 노론의 하수인 내시감 서인성은 아침에 규장각을 서성이다 인몽에게 발각된 내시 이경출을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처형한다.
낮, 이날 세 명의 죽음은 금등지사라는 책과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다. 과연 이 책은 어떤 내용인가? 또, 그것은 시
참모습을 그려냄, 진경산수, 왼쪽은 짙게 오른쪽은 밝게 표현함,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
*이명기의 채제공 초상화 : 붉은 옷, 검은관
*신윤복의 단오풍정 : 조선시대 풍속화, 세속적인 모습을 그린 풍속화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파란색과 예전 사람들이 생각하는 파란색은 다른색이 아닐까?
사업은 서명응(徐命膺)ㆍ채제공(蔡濟恭)ㆍ서호수(徐浩修)ㆍ신경준(申景濬) 등이 주도해, 반년여 만에 상위(象緯)ㆍ여지(輿地)ㆍ예(禮)ㆍ악(樂)ㆍ병(兵)ㆍ형(刑)ㆍ전부(田賦)ㆍ시적(市)ㆍ선거(選擧)ㆍ재용(財用)ㆍ호구(戶口)ㆍ학교(學校)ㆍ직관(職官) 등 총 13고 100권 40책으로 완성되어 1770년 8월에 인쇄.
국가의 근간을 해친다”
style.visibilitystyle.visibilitystyle.visibilitystyle.visibility1. 정치적 이유
남인 vs 소론
(채제공, 이가환) (이동직)
: 조선 전기의 소설논쟁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정치적인 이해가 얽힌 것으로, 순수하게 소설만을 배척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
- 제4차 ‘소설 수입 금서령’사건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 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
채제공(蔡濟恭)을 따라가서 이조원(李調元)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1779년에는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
● 그 외 학자들.
그 외 관련된 학자를 들자면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으로 물자가 소통되어야 하는 위치임에도 산이 막혀 그러질 못하여 경제유통의 역할을 하는 자리로 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정약용과 함께 수원화성을 설계하였다. 채제공은 영중추부사로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때에 접한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엮은 책이 바로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북학의>(北學議)이다. 북학이란 북쪽의 학문,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