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이후의 훈민정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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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 이후의 훈민정음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
1) 『훈몽자회』범례(凡例)
2) 자음 음소 배열
3) 모음 음소 배열
4) 학습서로서의 『훈몽자회』

3. 최석정의 『경세정운』(經世正韻)
1) 경세정운의 역(易)이론
2) 부 ․ 중 ․ 침(浮 ․ 中 ․ 沈)의 삼성삼재의 상(三聲三才之象)
3) 된소리의 음양교합설
4) 십일음취상팔괘도(十一音取象八掛圖)

4. 박성원의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
1) 범례
2) 오음초성표와 칠음출성

5. 이사질의 『훈음종편』(訓音宗編)

6. 유희의 『언문지』(諺文志)
1) 초성예(初聲例)
2) 중성예(中聲例) :
3) 종성예(終聲例) :
4) 전자예(全字例)

본문내용
세종 이후의 훈민정음론



1. 들어가며
세종 이후 세조와 그 이후에도 언해서들이 간행되기는 하였으나, 조선 시대 어학 연구는 훈민정음 창제를 전후로 하여 10여 년간 활발했다가 부진한 상태에 놓였다. 한글은 세종의 찬란한 업적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급면에 있어서는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지배층인 유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어에 능하면서 훌륭한 중국어 학자였던 최세진의 업적은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100년간의 공백 기간이 있지만 18세기에 들어서 국어학의 맥은 다시 활발히 이어진다. 최석정에서부터 신경준, 이사질을 거쳐 유희에게까지 이른다. 이러한 18세기의 국어학은 앞선 최세진의 것과는 달리 15세기의 국어학과 같이 동양 철학에 배경을 두고 있다.


2.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
『훈몽자회』(訓蒙字會)는 어린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 중종 22년(1527)에 최세진에 의해 편찬되었다.『훈몽자회』는 책머리에 '훈몽자회인'과 '범례'(凡例)가 있고, 본문은 '훈몽자회목록'이라 하여 상·중·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목록에는 '천문, 지리, 화품(花品), 초훼(草卉)' 등 33가지의 분류 아래 모두 3,360자의 한자의 음과 석(釋)이 실려 있어 국어 어휘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훈몽자회』범례(凡例)
범례는 10조로 된 본문과 '언문자모', '평상거입정위지도'(平上去入定位之圖)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범례 10조는 『훈몽자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알아 두어야 할 편찬상의 제반 원칙을 담고 있고, '평상거입정위지도'는 성조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에는 아직 언문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언문으로 한자의 음과 석을 표기하기 위해서는 언문의 사용법을 먼저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언문의 자모와 그 음가, 사용법을 상세히 풀어놓은 것이 바로 '언문자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는 범례 10조 중 그 아홉 번째 조항인 다음에 잘 나타나 있다.

무릇 시골 사람들 중에는 언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고로 언문자모를 아울러 싣는데, 먼저 언문을 배우고 다음에 자회를 배우면 깨달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자(한자)를 통하지 못하는 자도 역시 모두 언문을 배워 문자를 알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면 비록 스승에게 배우지 않더라도 역시 장차 문자에 통한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