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회변동] 한국과 중국의 산업화 과정(개발국가와 세계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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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사회변동] 한국과 중국의 산업화 과정(개발국가와 세계체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한국 개발국가의 형성·변동과 세계체제
1) 개발국가의 형성 : 1960년대
2) 개발국가의 공고화 : 1970년대
3) 개발국가의 쇠퇴 : 1980년대
Ⅲ. 개발국가로서의 중국과 세계체제
1) 개발국가로서의 중국 : 중국을 개발국가로 볼 수 있는가.
2) 세계체제와 중국의 개발국가 모델 선택
Ⅳ. 결 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 한국 개발국가의 형성·변동과 세계체제


1) 개발국가의 형성과 세계체제 : 1960년대

(1) 국가간 체제: 미국 헤게모니에의 적응
1960년대 개발국가 및 한국형 성장 모델의 형성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미국 헤게모니의 동아시아 지역 전략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한국과 미국 간 정치·경제적 관계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가간 체제였다.
첫째, 한국 개발국가 형성의 일차적 계기는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무상원조 → 유상차관)였다. 미국의 막대한 경제 원조로 자본축적 조건의 창출, 경제 구조의 재생산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1950년대와는 달리, 1960년대의 국가는 스스로가 경제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둘째, 박정희 정권은 애초에 내포적(국내적) 공업화 전략을 계획·추진했었는데, 한국 고도성장의 근간이 된 수출 중심의 대외 지향적 산업화 전략으로의 전환 역시 미국의 직·간접적 개입과 압력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미국은 1950년대 한국전쟁과 냉전 구조의 상황 속에서 막대한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해왔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내적 축적 메커니즘의 부재로 인한 축적상의 공백을 미국 원조를 통해 매우는 기형적이고 모순적인 형태로 한국 경제를 이끌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문제에 무관심하고 끊임없이 지대추구 행위만을 일삼는 이승만 정권의 ‘약탈국가적’ 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1957년을 전후해 미국의 대외원조 정책은 변화하게 된다. 제3세계 대외정책의 기조가 군사 우선에서 경제 중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이 급속한 산업화로 하나의 대안 모델로 부상함에 따라 제3세계의 경제 개발을 지원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New Look) 전략에서 시작된 대외정책의 전환은 케네디 행정부의 ‘신대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 of 1961)’ 제정으로 그 내용이 강화되어, 단기적인 군사 원조를 지양하고 자조할 능력이 있는 나라에게만 장기 유상차관을 제공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원조는 1957년의 3억 8,200만 달러를 고비로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는 차관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1961년 원조액은 1억 9,900만 달러로 1958년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하며, 1965년부터는 차관액이 원조액을 상회하기 시작한다. 원조정책의 변화와 대한원조의 급감이 예고되는 가운데, 미국은 이미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기 이전인 1957년경부터 주한 USOM(United States Operation Mission-Korea, 주한미국경제협조처)의 관리들을 통해 한국의 정책 당국자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의 작성·제출을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하의 부흥부(復興部)에서 작성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은 기본적으로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고, 미국의 종용으로 발표된 장면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은 계획 실행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과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5·16 쿠데타로 결국 사장되었다. 군사정부의 출범 이후 미국은 한국정부가 추구할 경제적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①추락하는 경제 성장률을 역전시킬 것과 제1차 경제개발 계획에서 특정한 목표치를 설정할 것, ②35%로 추정되는 실업률을 낮출 것, ③농가의 실질소득을 증가시킬 것, ④수입과 수출의 균형을 맞출 것 등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대외적 조건에 있었다. 물론, 경제개발 계획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한미 간의 이견과 갈등이 발생하지만,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 부담을 줄이고 한국의 경제 발전을 통해 동아시아 군사 안보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차원에서 장기적인 경제개발 전략과 경제적 자생력을 요구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와 경제계획의 수립 요구는 박정희 정권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개발국가로 전환되도록 강제한 1차적 계기였다.
다음으로 살펴볼 측면은 수출 지향적 산업화로의 전환과 관련된 것이다. 초기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에서 냉전 이데올로기와 미국 원조에만 의존해온 결과 한국의 국익이 희생되고 예속적 경제 구조가 강화되었다는 인식하에서 자립 경제의 구축을 지향하는 ‘경제적 민족주의’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공업화의 우선순위로 외화 획득이나 국제수지 개선 문제보다는 국민 경제의 대내적 완결성에 초점을 두는 ‘내포적 공업화’전략을 지향했다). 그 결과, 1962년 1월 발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초안은 ①내자를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국가 주도에 의한 민족 경제의 건설, ②자립 경제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시멘트, 비료, 철강, 정유 등 기간산업과 중화학 공업 건설에 주력, ③1차산품(농산물, 천연자원)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외화를 2차산업 및 기간산업의 수입 대체에 투자하는 것 등을 주된 골자로 한다. 그러나 내포적 공업화에 입각한 박정희 정권의 독자적인 경제개발 계획은 결국 미국의 비토권 행사로 좌절된다. 첫째, 내자를 동원하기 위해 1962년 전격적으로 단행한 통화개혁은 미국의 원조 중단과 차관공여 불허 등의 위협으로 곧 철회되었고 실패했다. 미국은 아무런 협의 없이 통화개혁을 결정한 박정희 정권에 크게 반발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둘째, 미국은 1963년 원조를 무기로 재정안정 계획을 요구·관철시킨다. 대대적인 재정 투자를 필요로 하는 애초의 발전 전략에서
참고문헌
▪ 김윤태, “동아시아 발전국가와 지구화”, 『한국사회학』, 제33집 봄호, 한국사회학회, 1999. 3,
▪ 김일영, “1960년대 한국 발전국가의 형성과정”, 『한국정치학회보』, 제33집 제4호, 한국정치학회, 2000. 2,
▪ 윤상우, “발전국가의 형성과 체제적 조건”, 『경제와사회』, 제72호, 한국산업사회학회, 2006. 12,
▪ 윤상우, “중국의 경제성장과 성장체제의 평가”, 『한국사회학』, 한국사회학과, 2005.
▪ 이홍영, “등소평 사후 중국에서의 경제 체제 변화”, 『아세아 연구』, 통권 98호, 199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