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사] 베델과 헐버트의 생애와 한국사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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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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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Ι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명 裵說, 1872~1909)

1. 생애

2. 배델과 대한매일신문

3. 베델선생의 서거 100주년

Ⅱ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26~1949.8.5)

1. 언론활동

2. 한국학 연구&저서

3. 독립운동


본문내용
2. 배델과 대한매일신문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신채호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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