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 `설공찬전` 작품분석 및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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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 `설공찬전` 작품분석 및 문학사적 의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설공찬전

1. 최초의 국문본 소설

2. 작자 채수(蔡壽, 1449~1515)의 행적

3.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줄거리 및 해설

4. 「설공찬전」(薛公瓚傳)의 파동

5.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의의


본문내용
「설공찬전」의 국문본 발견의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한문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 이후 신광한(申光漢)의 『기재기이』(企齋記異) 수록된 작품은 모두 4편으로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과 〈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이 각각 꽃과 문방사우를 의인화한 몽유담 계통의 작품이라면,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와 〈하생기우전(何生奇遇傳)〉은 주인공이 신선 또는 영혼과 만나는 명혼담(冥婚談) 계통의 작품.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충실히 계승한 전기소설(傳奇小說)



가 나오기 까지 80여 년에 이르는 소설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둘째, 그동안 추측과 심증 차원만 제기되어 온 허균(許筠)의「홍길동전」(洪吉童傳) 이전의 국문소설의 존재가 입증 되어 본격적인 국문소설이 등장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2. 작자 채수(蔡壽, 1449~1515)의 행적

조선 초기의 문신 채수(蔡壽, 1449~1515)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이며 남양부사 신보(申保)의 아들이다. 채수(蔡壽)는 1468년 세조대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관직에 올라 1470년 성종대에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젊은 언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학문에도 능력이 보여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477년 폐비 윤씨의 존휼(存恤)을 청하다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


를 피하였다.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중종실록』에 실린 채수(蔡壽)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채수(蔡壽)는 사람됨이 영리하여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와 음률을 가지고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이 부족하게 여겼다. 반정 뒤에는 관직을 맡지 않고 늙었다 하여 고향에 물러가기를 청해서 5년 동안 한가하게 휴양하다가 졸하였는데 뒤에 양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훈구파인 채수(蔡壽)는 58세때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하고 인천군(仁川君)으로 봉군되었다. 그 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58세 때부터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