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단재 신채호선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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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단재 신채호선생에 대하여
1. 독립운동가 신채호
단재 신채호는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의 거두로써 일제 강점기 당신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이다.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황성신문사에서도 일을 했었고,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신민회를 조직했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려 하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힘들다는 신민회의 정책에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신민회 회의에 참가하여 북만주 지역에 토지개간과 군관학교설립을 통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광복회의 부회장,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로써 활동했다.
미국 월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신채호는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에서도 평정관에 선임되었다. 통합된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고 회의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지명에 대해 그의 위임통치청원을 들어 반대하였다.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식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5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위원장을 맡았으나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반대하며 위임통치안을 규명 할 것을 요구하다 관철되지 않자 사퇴했다.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신채호는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자고 주창하는 신대한의 주필이 되었다. 1920년 만주의 독립군들을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하고자 군사통일촉진회를 발기했으나, 일제의 만주토벌에 의해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신채호는 창조파로 활약하였다.
신채호는 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달라는 김원봉의 요청에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자로써의 모습이 보였다. 1924년에는 다물단의 선언문을 작성했으며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28년 5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잡지 발간과 폭탄제조소의 설치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던 중 타이완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다롄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36년 2월 감옥에서 뇌일혈로 죽었다.
2.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
신채호의 초기 역사 연구는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독사신론을 저술하였고, 이순신, 을지문덕 등 구국의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저술하였고, 역사관계 논술 등을 주로 저술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신채호는 역사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는데 20년대 이후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사, 조선상고 문화사를 집필하였다. 신채호의 역사학은 전시기의 역사학의 한계를 넘은 근대적 역사학으로 발전했으며, 일제의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사학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그의 역사관이 영웅중심의 역사관에서 민중중심의 역사관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신채호는 역사는‘아와 비아의 투쟁’이라 하여 대외적으로는 우리 민족, 국가를 강조하고, 대내적으로는 투쟁을 통해서 사회가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신채호는 주로 고대사에 대해 저술하였다. 삼한과 신라 중심의 역사연구가 아닌, 고조선-부여-고구려를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였다. 신채호는 역사연구를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요동지역과 요서지역까지 연구하였다. 한반도 내부에 존재하였다는 한사군을 반도 밖이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신라보다 발해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낭가사상을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이라 하여 높이 평가했으며, 묘청의 난 당시 묘청을 낭가사상의 대표자, 김부식을 유가사상의 대표자로 평가하여, 묘청의 난을 김부식이 진압하면서 낭가사상이 끊어졌음을 아쉬워했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춘추필법의 노예성에 기초한 사대주의’라며 비판 하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살펴보면 신채호는 단군신화의 비과학성을 지적하며 공동체 신앙의 제주를 단군으로 파악했으며, 삼한은 전, 후 삼한으로 나누웠다. 고구려의 건국을 200년 이상 올려잡고 있으며, 고구려를 한민족을 외세에서 보호한 이상국가이자, 삼국 중 정통으로 평가했다. 대륙백제라고 일컬어지는 백제의 산둥지방 공격과 점령을 주장했으며, 일본 역시 식민지였음을 강조한다. 신라의 비중은 크게 두지 않았고, 신라의 삼국통일 역시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긴 것으로 평가하여 부정적으로 평하였고, 신라정통론을 부정하였다. 발해사를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할 것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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