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2장) - 인민민주주의국가 수립,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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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2장)
1.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한 후에 조선 전역은 권력의 공백상태였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보안대, 치안대, 자치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등 자치조직이었다. 자치조직들은 주로 치안 확보와 일본인재산 접수에 중점을 두었다.
중앙에서는 중간좌우익민족주의세력과 공산주의세력의 연합체인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소 양군이 남북조선에 진주하게 됨으로써 남북조선의 정치지형은 미소 양군 점령정책의 규정을 받아 크게 변해 갔다. 북한 지역의 조선인 자치조직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소련군은좌익이 우세하거나 균형을 이루도록 조직을 재편하여 행정을 위임했다.
소련군정은 초기에 한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북조선만의 정권적 조직의 형성을 지시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9월 19일 소련군과 함께 귀국하면서 평양의 소련군위수사령부부사령 직함을 갖고 있었다. 김일성은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밑에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일성은 박헌영과 타협하여 서울 중앙당에 속하는 형태로 공산당분국을 만드는 데 합의하였다. 1945년 10월 10일에는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열어 분국 설치를 합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제1비서에는 김용범, 제2비서에는 오기섭이 내정되었다. 김일성은 이 대회에서 당의 기반이 아직 취약하다고 하는 주체적 역량 부족에 대한 자기인식 아래, 자본가도 노동자도 참가하는 반파시스트통일전선 결성을 통한 “민족통일정권의 수립”을 제1차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현 단계는 “자본민주주의정권” 수립 단계에 있다고 규정한다.
대회에서 김일성은 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지는 않았다. 그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보다는 민족의 지도자, 전 인민의 지도자로 선전되고 있었다. 그는 공산당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통일전선의 결성에 착수하고 있었다.
10월 23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총비서 박헌영의 명의로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설립에 대한 결정”을 승인하였다.
분국의 창설은 공산당의 지역적 분립이 일단 관철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1945년 11월 19일에는 북조선5도행정국이 발족하여 10개의 국이 조직되었다. 조직국장에 남한 출신 리순근이 농림국장에 사법국부국장에 최용달이 임명되었으나, 5도행정국은 공식적으로는 서울의 인민공화국이나 중앙인민위원회와 소련군의 합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북조선의 각 도인민위원회와 소련군사령부 민정부와의 교섭을 통하여 발족하였다. 11월 20일~25일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가 열렸다.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 대표다가 최초로 모인 중요한 대회였다. 대회에서 채택된 성명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의 동경의 국호이며 의욕의 단체이나, 미군정의 의사를 존중하며 그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미군정으로부터 개명 교섭이 있은 후로부터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문자의 사용을 피하여 왔으며, 미군정이 존재하는 한 38도선 이남에서는 정부로서의 기능과 행동을 할 수 없으며, 또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인민공화국은 이 대회를 기점으로 실질적으로 그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공산당이 농민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던 것이 소작료 37제 투쟁이었다. 당연히 지주층과의 충돌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공산당과 민주당의 통일전선에는 많은 갈등이 생겼다. 11월 중순 공산당에 대한 주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발생한 용암포 사건이 하순에는 신의주의 학생시위 사건으로 확대되어, 소련군과 시보안부가 유혈 진압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신의주 사건은 당시 북조선 정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일성이 사태의 수습에 나서 시보안부장이 발포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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