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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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마오쩌둥 시기의 대외관계의 특징은 경제 발전이나 국제적 지위의 제고를 위한 수단으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중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혁명에 성공하여 사회주의의 틀을 갖추어야 하는 국내적 상황과 미소냉전 구조라는 국제 환경이 고려된 결과입니다. 1954년에는 국제 사회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평과 공존 5원칙을 표방하면서 제3세계권 국가와의 관계증진을 모색하는 평화 공준 시기를 보내었습니다.1960년대에는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제3세계권 국가에 중국을 스스로 포함시키면서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부터 폭력적인 혁명외교를 수행함으로써 대외 관계에서 커다란 고립을 자초하는 외교상의 공백기를 초래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과 관계를 좋게하고 이로 인해 중국은 유엔의 안전보장 상임이사국으로 복귀하는 등 세계 무대에서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덩샤오핑 시기의 대외관계(1979-1997)
덩샤오핑은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실용주의적인 국가 이익을 중시하는 대외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는 경제발전과 시급한 국내적 상황과 안보상의 위협이 감소된 외부 환경의 변화가 반영된 결정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목표는 현대화 건설을 국가 목표로 정하고 이의실현을 위해 어떤 국가로부터도 압력을 받지 않거나 어떤 국가로도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외교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경제 발전을 위해 대외 정책 운용의 폭을 유연하게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 국가와도 교류를 했으며 심지어도 국교가 없던 한국과도 교류를 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6월에 발발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이어지면서 이 시기에 중국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체제와 이념을 강화하는 수세적인 외교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의 핵심은 장기간 사회 교류를 통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평화적으로 몰락시키려는 서방측의 전략인 화평연변(평화적인 전복)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반화평연변의 추진이었습니다. 1933년부터 중국은 탈냉전의 대외적 환경에 대한 인식과 국내 위기를 극복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필요에 의해 전방위 개방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방위 개방외교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도 교류한다는 것으로서 독립자주 외교노선의 기조하에서 지금까지 전개되고 있다.
쟝쩌민 시기의 대외관계(1997년이후)
덩샤오핑이 사망한 1997년 이후 비로소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된 쟝쩌민시기의 대외 관계도 덩샤오핑 시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은 세계를 평화와 발전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 발전의 지속적인 유지가 중요한 목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만 약간의 차별성이 있다면 국제 사회에서 경제 실력에 버금가는 역할을 추진하고자 하며 나아가 세계 질서의 주도국으로서 부상을 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중국은 사안에 따라서는 미국과 충돌을 자제하는 선에서 적극적인 개입도 강화할 것이며,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과 경쟁을 하면서 중국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으로 예상되비다.
공자를 살려야 중국이 산다
중국에서 공자의 사상이 외면 당했던 시기는 청나라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1840년 아편 전쟁을 계기로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했던 중국이 주변국으로 전락하게 되자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복귀하려는 중국인의 열망이 드높았었습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해온 유가사상으로 눈을 돌려 중국이 낙후하게 된 원인을 유가에서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우수한 중국의 전통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보수적인 관점과 중국의 전통을 보완하자는 개혁적인관점 그리고 중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혁명적인 관점 그리고 중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혁명적인 관점이 그것입니다. 개혁적인 관점은 서구 자본주의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으니 실패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방식이 혁명을 통해 중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회 주의 국가가 성립된 1949년 이후 중국에서는 과거의 통치 이념이자 사회 지배 질서의 원리였던 유가사상을 사회주의 이념이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반전통과 반봉건의 구호 아래 유가 사상과 전통 유가 질서는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1978년 개혁개방이 시행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 발전관이 수정되고 해외 교류가 빈번해지자 그동안 타도의 대상이었던 유가 사상에 대한 태도도 전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4년 전면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할 즈음 중국에서는 소위 문화열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논쟁의 초점은 중국의 나아갈 길이 어디이며 이를 위해 중국의 문화와 서구의 문화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입니다.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중국은 이를 활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바로 유가사상문화권국가인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이 고도성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1990년대 중반에 이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근거하여 중국의 전통 문화와 서구의 문화 중에 현실 중국에 유용한 부분은 계승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비판하되 중국과 서구 문화의 우수한 부분을 종합하여 새롭게 창조하자는 것입니다. 유가사상이 다시 중국에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끌어야 하는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장기간 집권하면서 경제 발전을 일구어낸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 경로가 매력적이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