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유물조사 창경궁 명정 전명 정문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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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고학 유물조사 창경궁 명정 전명 정문 행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창경궁(昌慶宮)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上王) 왕조시대 현왕(現王) 이외에 전왕(前王)이 살아 있을 경우 전왕을 부르던 호칭.
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 2월부터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繼妃)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수강궁을 확장하여 성종15년(1484년)에 완공된 별궁 임금이나 왕세자(王世子)의 혼례(婚禮) 때에 왕비(王妃)나 세자빈(世子嬪)을 맞아들이던 궁전(宮殿).
이다. 한미자,『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돌베개, 2009.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昌德宮)과 붙어 있어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남쪽으로는 종묘(宗廟)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의 왕궁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중에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배산임수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지세(地勢)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세.
가 낮은 동쪽으로 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산세(山勢) 산이 생긴 모양.
가 받쳐주고 있는 자연의 입지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주위 환경을 존중하다보니 다른 궁궐에 비해 공간이 비좁고 동선도 짧으며 방향도 예외적 적용이 이루어짐.
창경궁의 건물은 정전(正殿) 왕이 나와서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인 명정전(明政殿), 편전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궁전.
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등이었고, 궁의 둘레는 4,325척 1척=30.3cm, 4,325척=129750cm.
이었다.
참고문헌

창경궁
강우방,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솔출판사, 2004.
한미자,『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돌베개, 2009.
명정전
강우방,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솔출판사, 2004.
김동현, 『서울의 궁궐권축』, 시공사, 2002, p.168.
한미자,『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돌베개, 2009.
문화재청, 명정전,cha.go.kr, 2015.5.1.
명전문 및 행각
한미자,『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돌베개, 2009.
문화재청, 명정문 및 행각, cha.go.kr, 2015.5.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encykorea.aks.ac.kr, 201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