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고구려비 고구려의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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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원고구려비 고구려의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금석문이 사료로서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 당대 사람들이 직접 쓰고 또 온 세상에 드러나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 아닌 사실만이 기록된다. 1979년 4월, 한반도 한가운데서 1500여 년 전에 세워진 고구려비가 발견됐다. 중원고구려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중원고구려비에 대해 알아보고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석학이 역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학문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기회가 될 것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무엇인가」
1979년 2월 처음 발견된 후 같은 해 4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확인된 고구려 시대의 석비이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도 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비문의 훼손 상태는 심각했다. 워낙 마모상태가 심했기 때문에 글자를 다 읽을 수 없었고 그래서 발견이후 학계에 일제히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후 더 이상의 연구가 진척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발견 20년 후인 지난 2000년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면서 첨단 장비를 활용한 비문 해독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이 작업을 통해 새롭게 23자를 판독하게 되었는데, 우측에서 고구려의 ‘전부대형’이라는 확실한 관직명이 나왔고 뒷면이 글자가 있느냐, 없느냐로 상당히 오래 논란이 됐었는데 거기서 巡자가 밝혀지면서 4면 비로 확인되었다. 또한 중원고구려비는 423년 장수왕 때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됐었는데, 그게 아니라 그의 손자인 문자왕에 의해서 5세기 후반에 세워졌다는 보다 확실하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高麗太王祖王’, 즉 왕이 선왕을 할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왕은 문자왕이었다. 장수왕은 그 이름과 같이 장수를 한 탓에 왕위를 이을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장수왕의 뒤를 이어 492년 그의 손자인 문자왕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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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석의 높이는 1.44m로 광개토대왕비의 1/4 축소판이라 보면 되겠다.
1981년 3월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비문분석」
高麗太王
흔히 문헌에 보면 고구려 국호를 ‘고구려’라 부르기도 하고 ‘고려’라고 부른 것도 있다. 또한 ‘태왕’이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에도 나오는데,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고구려왕을 ‘태왕’이라고 높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新羅寐錦
광개토대왕비에도 등장하는 이 ‘매금’이라는 말은 중원고구려비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이 두 개의 고구려비 외에 삼국시대를 기록한 우리 나라 사서에는 ‘매금’이란 명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매금은 고구려가 신라왕을 낮춰서 부르는 이름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아주 단적인 증거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蔚珍鳳坪新羅碑의 발견으로 매금의 해석을 달리하는 주장이 나왔다. 고구려의 비칭이 아닌 신라의 어느 시기에 왕을 부르던 명칭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