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 과 곤지키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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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장한몽(長恨夢)과 곤지키야샤(金色夜叉)
1. 장한몽과 곤지키야샤
1910년을 전후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서 민족의식이 제고되던 때이다. 문학적으로는 신문학의 흐름이 계속되면서도, 새로운 기법과 의식을 담은 현대 문학이 출현한 이른바 현대문학의 태동기이기도 하였다. 1908년 최남선에 의하여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가 등장하였으며, 태서 문예 신보에 김억의 봄은 간다, 1919년 주요한의 불놀이가 발표되면서 자유시가 등장하였다. 또한 현대소설의 출발로 보는 이광수의 장편 소설 무정이 1917년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에 의해 문학 활동이 주도되어 2인 문단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는 외국 문학을 번안한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발표하고자 하는 장한몽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당시 외국 소설은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으나 외국어를 해독할 능력이 없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번역이나 번안을 통하여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장한몽(長恨夢)은 그 중에서 대표격으로 꼽을 수 있는 번안소설로서, 오자키 코요(尾崎紅葉)의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조중환(趙重桓)이 번역한 것이다. 당시 모든 언론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국어 신문이자 총독부 어용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를 통하여 연재된 장한몽은,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된다. 장한몽은 상편이 1913년 5월부터 10월까지 연재되고 있었는데 (하편은 1915년 5월 25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연재), 연재 도중인 같은해 8월에 이미 무대에 올랐고, 그 후 영화화 되는 등 크게 유행하게 된다. 장한몽은 말 그대로 신문학 최초의 베스트셀러였으며 신파극의 대표적 레파토리였을 뿐만 아니라, 1990년의 ‘신장한몽’ 1995년의 ‘심수일과 이순애’처럼 최근까지도 각색을 거쳐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오리지널인 곤지키야샤는 1897년 1월부터 1899년 1월까지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되었던 일본 신파의 고전으로 꼽히는 소설로 작가는 오자키 코요(尾崎紅葉)이다. 오자키 코요는 나츠메 소세키와 같은 1867년에 동경에서 태어났으며, 동경대학의 선배였던 츠보우치 쇼요(坪逍遙)의 소설 신즈이(小神)의 영향을 받았다. 오자키 코요와 고우다 로한(幸田露伴)은 츠보우치 쇼요나 후타바 테시메이(二葉亭四迷)등의 사실주의와 근대화에 비판적이었으며, 오자키 코요가 리더로 있던 문학그룹 켄유우샤(硯友社)는 에도시대 문학의 재해석을 시도했다. 이 곤지키야샤도 에도시대적인 요소가 강하다. 곤지키(金色) 야샤(夜叉)라는 제목, 즉 ‘금색’으로 상징되는 돈을 ‘귀신’(야차)으로 표현하고 있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작가는 근대화가 가져오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이 작품에 담고 있다. 곤지키야샤는 우선 신문연재소설로 발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후 신파극(정확히는 新派의狂言), 영화등의 미디어로 퍼져나갔으며, 장한몽도 신문연재소설로 발표된 후,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신파극, 영화로 이어져나갔다. 당시 이 작품들이 신문에 실리는 아침이면, 사람들 사이에서 신문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하니 그 인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곤지키야샤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시기사와 미야(澤宮)의 집에서는 고아 하자마 간이치(間貫一)를 거두어 키운다. 이윽고 간이치가 고등중학교에 입학해 다닐 정도로 성실하게 성장하자 미야의 부모는 장차 데릴사위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간이치가 제국대학에 진학하여 학사학위라도 받게 되면 남부럽지 않은 사위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야 역시 준수하고 성실한 간이치가 싫지 않았다. 비록 메이지 음악원 시절에 ‘남자가 재능만 있으면 마음대로 출세하듯이 여자도 미색을 갖고 부귀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외모를 고관대작 명문가의 부인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장차 간이치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야는 간이치를 장래의 남편으로 간이치는 미야를 장래의 처로 여기며 지내었다.
그러나 정초 카루타(놀이나 노름에 사용하는 장방형의 딱지)놀이판에서 미야의 미모에 한눈에 반한 자산가 도미야마 다다쓰구(富山唯繼)가 청혼을 해 온다. 그러자 미야의 아버지는 간이치와의 약속을 저버리며 미야를 도미야마에게 시집보내고자 한다. 또한 미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고자 하던 자신의 학창시절 꿈이 현실성을 갖게 됨에 마음이 흔들린다. 방황 끝에 미야가 내린 결론은 대충 예견되는 간이치와의 미래의 삶보다도 자신으로서는 상상되지 않는 도미야마의 부인 즉 귀부인으로서의 미래의 삶을 택하게 된다.
미야의 변심을 눈치챈 간이치가 아타미(熱海) 해안에서 마음을 돌려 달라고 호소를 하지만 미야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격분한 간이치는 미야를 발로 차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미야는 간이치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도미야마에게 시집을 가며, 2개월 후에는 임신하게 되고 이듬해 봄에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과 자신의 상상과는 판이한 귀부인의 실태 ‘기계처럼 남편을 시중하고 장식물처럼 집안에 틀어 박혀 지내며, 새장 속에서 허무하게 구름을 바라보는 새와 같은 신세’ 에 절망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출산 후 미야는 더욱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고 그 탓인지 급격히 건강을 잃고 3개월간 심하게 앓는다. 자연히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고 결국 아이는 페렴에 걸려 죽는다. 그러나 미야는 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며 다시는 도미야마의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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