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국가사회주의 와일 원적지도체제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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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국가사회주의 와일 원적지도체제 확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일성은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각국 공산당 및 노동당대표회의에서 채택된 모스크바선언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주된 위험인 수정주의와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맑스레닌주의의 순결성을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내부의 적에 대한 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옹호를 강조한 것을 기초로 그동안의 반김일성운동이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고 소련계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2월 16일 북조선 정부는 소련 정부 대표와 이중국적자의 공민권조절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이중국적자들은 1년 이내에 한쪽 국적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소련계 숙청을 위한 대외적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후 불기 시작한 숙청의 폭풍우 속에서 상당수의 소련계는 신변상 위협을 피하여 소련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1958년 초부터 김일성은 인민군 총정치국에 대한 중앙당 집중지도에 착수했다. 중국군 철수에 대비하여 인민군당제도의 재건에 착수한 것이다. 이는 인민군 내에서 연안계와 소련계를 추방하여 명실 공히 항일빨치산의 군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종학, 부국장 김을규, 최왈종 등이 해임되었다. ‘반혁명적 폭동사건’이 꾸며지고 장평산, 김웅, 최인 등 연안계 군인이 체포되면서 이 사건을 구실로 인민군 전 부대에 대한 집중지도가 펼쳐졌다. 1958년 3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열린 대표자회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에 관해 국가계획위원장 리종옥이 보고하고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 당부위원장 박금철이 보고했으며 김일성이 최종적으로 보고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특히 박금철의 보고와 김일성의 결론은 지금까지의 당내 숙청을 총괄하는 내용이었다. 박금절은 “반종파투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지방주의와 가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파는 지방주의와 가족주의를 온상으로 하여 뿌리를 뻗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결론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957년도의 경제적 성과로서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었다는 자신감이었다. 따라서 연안계와 소련계의 숙청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정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연안계 거두인 전 최고인민회의위원장 김두봉, 소련계 부수상 박의완, 국내계 수매양정상 오기섭, 석탄공업상 류축운이 종파분자로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국립도서관장 한빈, 민족보위상 김웅도 비난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김일성은 수정주의의 예로 김두봉이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가 당보다 높다”고 한 것, 서휘가 “직맹은 당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 인민군총정치국 부국장 김을규가 “인민군대는 당의 군대가 아니고 통일전선의 군대”라고 한 것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한다.
1958년 3월 8일 인민군 내 당정치사업을 토의하기 위하여 소집한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광협이 1956년 독립 4군단 내에 반당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제1차 당대표자회를 통하여 ‘반당종파해위’와 ‘반혁명 폭동음모’가 결하되고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리필규, 서휘, 김승화, 리상조’ 등 7명으로 초저밍 맞춰져 ‘반당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정식으로 찍혔다.
1958년 10월 30일 김일성은 김두봉, 최창익, 한빈 리유민, 김민산 등 신민당 출신자들이 폭동 음모를 꽤했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1958년 3얼 당대표자회에서 일제시대 적색농조운동을 했던 최고재판소장 황세환, 검사총장 조성모, 사법부상 박용숙을 당간부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비판했다. 이는 북조선에 기반을 가지면서 김일성에 협력해온 국내계의 몰락을 예고한 것이다. 함경남도당에서 “반당종파분자이며 지방할거주의자”로 오기섭이 공격받고 황해북도당에서 마동공업건설트레스트 지배인으로 좌천되어 있던 박창옥이 다시 비판 숙청되었다. 역사기술은 “1030년대 이후 국내에서의 로동자, 농민의 반일혁명운동과 폭동적 진출은 김일성동지가 령도한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위성적 운동이 되었다”는 식으로 변화했다. 1930년대의 총본부가 여기 항일빨치산부대에 있었고, 그것은 김일성동지가 지도했다“고 결론지었다. 당의 통일전선 정책은 조국의 통일독립을 지지하는 동시에 반드시 사회주의사상을 지지하는 사상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민주당, 청우당,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사상투쟁’, 즉 숙청사업이 진행되었다.
전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고 당내 숙청도 마무리됨으로써 다음 당면과제는 통치기구의 전면적 개편이 되었다. 1958년 1월 당간부부가 폐지되고 부문별 간부사업이 각각의 해당 부서에 이관되어 당중앙 및 지방 각급 당위원회에 각 행정부문의 간부를 관리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각 당부서가 간부사업을 관장하고 조직지도부가 각 부서의 간부사업을 종합하게 되었다. 더욱이 당 행정부가 신설되어 최고인민위원회상임위원회, 재판소, 검찰소, 내무성, 군대 내 간부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당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관계를 언급하기를 “군인민위원회는 조직상으로는 도인민위원회에 속하지만 당적으로는 군당의 지도를 받는다”고 말하고 “군인민위원회는 군당위원회 앞에 책임을 지는 행정 기관”으로서 “군인민위원회가 도인민위원회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았다고 하면 군인민위원장은 그 지시를 집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군당위원장과 협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조선인민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 『김일성 선집』 제5권, 399-403쪽
당 우위의 제도화는 김일성도 말한 바와 같이 우선 군대 내에 도입되고 이후 지방경제지도체계의 개편과 함께 농촌에서는 ‘청산리방식’으로, 공장에서는 ‘대안의 사업체계’로 2년 정도 걸려 실현되어 갔다.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8일간 제4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9월 11일자 『로동신문』사설은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의 대회라는 제목하에 “실로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느 지방, 어느 부문을 막론하고 당의 령도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우리가 달성한 모든 성과는 그 어느 하나도 김일성 동지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며 “전 당이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의 주위에 하나의 사상의지로 철통같이 통일 단결”되어 있고 “100여만 당원이 일치하게 숨을 쉬며...전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일성은 장문의 보고를 하였으며, 1957년부터 60년까지 이루어진 경제성장을 자부심을 갖고 총괄했다. 이 같은 성과는 “사회주의 건설의 대고조 속에서 천리마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천리마운동은 “공산주의 교양과 혁명전통교양을 결부시켜” 진행했던 결과로서 “생산에서의 집단적 혁신운동과 근로자들을 교양 개조하는 사업과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것으로 정의되었다.
대회의의 마지막 날인 9월 18일 당규약이 약간 수정되어 채택되었다. 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당상무위원회 명칭이 정치위원회로 바뀌고 당조직위원회가 폐지되었다. 민주청년동맹은 ‘조선로동당의 후비대로, 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무장력‘으로 확실히 명시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규약 전문 내용에 나타났다. “조선로동당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항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영예로운 혁명전통의 직접적 계승자이다”라고 규정한 점이다. 여러 민족해방투쟁의 전통에서 김일성이 빨치산투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투쟁 전통은 배제되고 빨치산투쟁으로 일원화된 결과였다.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출범하였다. 제1부수상 김일을 비롯한 8명의 부수상과 35명의 각료, 부수상과 각료의 겸임자를 합쳐 총 40명의 명부가 발표되었다. 내각은 당정치위원회에 완전히 포괄된 모습이 되었다. 빨치산파는 부수상 서열 제1, 2위로 내각을 통할하는 제1부수상 김일, 군사부문을 담당하는 부수상 김광협, 각료 서열 제1,2,3위로서 민족보위상 김창봉, 사회안전상 석산, 외무상 박성철이 요직을 장악했다. 내각에 로동당 이외의 정당 출신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40명 중 5명을 제외한 전원이 당중앙위원, 후보위원, 검사위원 가운데 어딘가에 속했다. 당, 내각, 최고인민위원회의 일체화가 완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