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전자공학 전공 미래의 과학기술강국을 향한 온고지신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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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전자공학 전공 미래의 과학기술강국을 향한 온고지신의 지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난 2005년 12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는 ‘황우석 사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국민의 영웅으로 불리던 황우석교수가 이제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과학적 성과를 과장하길 꺼리고, 특히 한국의 평가에 인색한 세계 권위지들의 후한 수사어구를 보면서 잠시나마 나 또한 길가는 외국인에게 ‘짜샤, 한국인이 이정도야.’라고 나도 모르게 우쭐대며 어깨에 힘주던 기억이 난다. 물론 현재도 사건은 진행형이며 언제, 어떤 결말로 막을 내릴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그 열풍은 정말 대단했다. 원하는 연구비는 다 대주고 경호도 대통령과 삼부요인에 버금가는 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랄 만큼 한국 국민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에 열광했다. 그 배경은 아마도 막대한 잠재시장을 가진 생명과학 연구가 앞으로 한국경제에 가져다 줄 이득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물론 연구결과의 산업화가 어느 정도의 고용효과를 창출할 것이며, ‘업적’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수혜가 돌아갈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지만, 사람들은 단지 개연성에만 근거해서도 생명공학 연구를 지지할 수 있었다. ‘땅덩어리 작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만이 자원이요, 공부만이 출세의 지름길이다.’라는 얘기를 침이 튀어가며 얘기하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러리라 다짐해보건만 아직 그렇다할 싹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과연 600년 전 조선에서 또한 세계가 주목할 만한 그런 과학기술은 없었을까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오늘날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 창제라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임금님으로 평가받는 또 다른 이유는 과학의 발달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먼저 세종 시대의 과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 시대 과학의 특징과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2. 세종 시대의 과학
1. 세종 시대 과학의 사례
- 천문학과 역학
옛날 천문현상은 신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때문에 계절의 변화, 별자리의 이동, 혜성, 유성, 일식, 월식 등 천문현상과 가뭄과 장마, 천둥, 번개, 해일, 태풍 등의 기상현상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이런 천문 및 기상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나 할 수 없었으니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왕의 심복만이 할 수 있었고 왕이 제사장을 겸할 때는 신의 뜻을 헤아려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사람들의 죄를 고하며 제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미래와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가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무나 천문을 공부할 수도 없었고 천문은 왕실의 기밀사항이었다. 주몽에 나오는 삼족오도 동북아시아의 신화에서 태양 속에 산다는 태양조를 의미한다. 때문에 왕인 주몽을 상징하는 새로 태양조인 삼족오를 쓰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달력도 개인이나 과학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교황이나 중국의 황제만이 만들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명나라나 청나라의 달력을 구해다 썼고. 서양에서도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나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달력을 만들었었다. 세종 시대의 천문학은 천체를 관측하는 기기를 제작하고 관측시설과 제도를 완비하며, 자주적 역법체계를 확립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많은 업적이 이루어졌다.
1) 간의
해시계·물시계·혼천의(渾天儀:천문시계)와 함께 조선의 천문대에 설치한 가장 중요한 관측기기로, 오늘날의 각도기(角度器)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1437년(세종19)에 완성된 간의제도는 《원사(元史)》에 나타난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하여 대간의와 소간의를 만들었는데, 소간의는 대간의를 휴대용으로 축소해서 정동(精銅)으로 다리[趺]를 만들고, 그 둘레에 수거(水渠: 일종의 도랑)를 파서 자오(子午)에 준하여 수평을 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적도환(赤道環)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七政: 일 ·월과 수 ·화 ·금 ·목 ·토의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재며, 12시(時) 100각(刻)으로 나눈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 안에 있는데, 그것으로 일구(日晷: 시각)를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 해가 질 때와 돋을 때 하늘 정남쪽에 보이는 별)을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1432년(세종14) 장영실(蔣英實)등은 목제간의를 만들었으며 1438년에는 구리로 대·소간의를 만들어, 대간의는 경회루 북쪽에 있는 간의대에 설치하고, 소간의는 휴대용으로 사용하였다. 간의는 조선의 천문학에서 적도(赤道)에 관한 위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만든 것으로, 혼천의의 육합의(六合儀)·삼진의(三辰儀)·사유의(四游儀)중에서 적도환·백각환·사유환 만을 따로 떼어서 간소화한 것이다.
2) 혼천의
혼천의의 제작은 농업생산과 직접 관련이 있는 천문 기상학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혼천의는 천문 시계이며 각종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천문 관측기구이다. 혼(渾)은 둥근 공을 뜻하고, 혼천의란 같은 중심과 여러 개의 원으로 구(球) 모양을 만든 동심다중구(同心多重球)를 의미한다.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에 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나 통일신라시대에 혼천의로써 천문을 관측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진다. 혼천의에 관한 확실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 15년(1433) 6월에 정초(鄭招), 박연(朴堧), 김진(金鎭) 등이 만들었다는 기사이다. 8월에도 정초, 이천, 정인지(鄭麟趾), 김진 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혼천의에 대하여 실록에는 그 이상의 언급이 없다. 정인지, 정초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 장영실(蔣英實) 등이 제작을 감독하였는데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고 이어 청동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세종 이후 조선 천문학의 가장 기본적 천문 기구이다. 이때부터 물을 동력으로 이용한 수격식(水激式) 동력의 천문 시계가 천문·역법 관측의 표준 시계로서의 구실을 했다. 그 후 혼천의는 수리되기도 하고 또 새것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에 모두 소실되었으며, 임란 후에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못했다.
3)양부일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