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기피와 세종대 의과학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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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공계 기피와 세종대의 과학 발전
서론
몇 년 전부터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적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우수한 이과 학생들이 힘든 이공계를 기피하고 의학 계열로 진로를 잡고 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도 의치학 전문 대학원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사회 발전의 기본이 되는 기초 과학 기술 분야의 기반이 점점 취약해 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두가 이공계 기피를 걱정하면서도 별다른 효과적인 방책을 못 내고 있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이공계로 사람이 와야 된다고 역설하고 있고 이공계 학생에 대해 일부 혜택도 주어지지만 공허한 울림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 조선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는 직업에 의한 신분적 차등이 있었다. 이러한 차등 속에서 공업은 더욱 발전을 못하였다. 그런데 세종대에는 신분적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과학적 기술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럼 어떻게 세종대에는 신분적 제약과 불평등 속에서도 이러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세종시대의 신분차별을 뛰어 넘어 기술 발전을 이룩한 배경을 알아보고 현재의 이공계 기피 현상과 비교 해 보겠다.
본론
세종대의 기술의 발전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발명품들이 있었다. 언어적으로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해서 군사적으로는 화포의 발전 농업 생활적인 측면에서는 측우기 해시계 등의 발전이 있었다. 공업을 업으로 하는 자들은 신분적 차별을 받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대단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신분적 차별과 직업적 차별은 개개인에게 엄청난 굴레로 작용하였을 텐데 말이다. 그럼 세종 시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인 장영실에 대해 알아보자. 장영실의 본래 신분을 살펴보면
『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대 원(元) 나라의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세종 061 15/09/16 을미)
가장 아래 신분인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었다. 장영실의 발명품을 살펴보면, 장영실이 처음 만들었던 과학기기는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인데 이 간의로 잰 당시의 한양이 북위 38도 부근으로 밝혀져 정확한 측정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1433년 간의를 더욱 발전시킨 혼천의(渾天儀)를 완성시키고 1434년 정교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완성시켰다. 장영실이 만들었던 또 다른 걸작은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일성정시의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옥루(玉漏)등을 꼽을 수 있다. 장영실은 1442년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냈다. 서양에서 카스텔리가 1639년 만든 측우기보다 2백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던 이 측우기는 강우량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의 크기, 빗방울이 떨어질 때 생기는 오차까지 고려해 만든 과학적인 것으로 현재 WMO(세계기상기구)가 정한 측정오차에도 합격할 만큼 뛰어난 업적이었다. 장영실은 또 한강과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제작, 측우기와 함께 당시 농업기상학의 전기를 마련했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어떻게 노비의 신분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는 세종의 인재 등용과 연관이 있다.
『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선무인 것이다. 관원이 그 직무에 적당한 자이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지나니, 그 직위에 있는 동반 6품과 서반 4품 이상으로 하여금 시직(時職)830) 이나 산직(散職)831) 임을 구애함이 없이 지모(智謨)와 용력이 뛰어나서 가히 변방을 지킬 만한 사람과 공정하고 총명하여 가히 수령직에 대비할 수 있는 자와,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극히 번거로운 자리에 감당할 수 있는 자 3명을 각각 천거하여 임용에 충당하게 하되, 혹 그 인재를 알기 어렵거든 과목마다 반드시 각기 한 사람씩을 찾아서 구할 것 없이 다만 아는 대로 〈쓸 만한 사람〉 3인을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정에 따라 잘못 천거하여, 〈그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그 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한 자는 율문을 살펴서 죄를 과하되, 조금이라도 가차 없게 하라.” 』(세종 022 5/11/25 임인)
세종은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신분이라는 제약이 비하여 그 기능이 우수하다고 생각되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필요한 일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하게 때문에 신분의 차별을 이겨내고 세종대에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혼자의 힘으로는 여러 가지 지식이 필요한 과학 기술들을 발명시킬 수 없다. 장영실이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를 옆에서 도와주는 다른 팀원들이 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직전(直前) 김빈(金)·호군 장영실(蔣英實)·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사인(舍人) 정척(鄭陟)·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논어》 등 책의 자형(字形)을 자본으로 삼아, 주자(鑄字) 20여 만 자(字)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세종 065 16/7/2 정축)
또한 혼천의 발명 과정에서도 정철 등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는 즉 세종이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인재를 뽑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얼마나 잘 이용해야 하는 가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세종대의 과학 기술의 발전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그럼 지금 이공계 기피 현상이 팽배해 있는 현실에서의 대응책을 세종대의 과학 발전을 통해서 알아보자.
참고문헌
※참고문헌
세종의 국가경영 김영수 저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IR52장영실상 (http://www.ir52.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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