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벤트의 역사와 발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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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이벤트의 역사와 발달과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문헌고찰을 통해 우리나라 이벤트의 기원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국가적인 행사로 제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제천의식이다.
우리 민족은 축제의 민족이었다. 무천이나 영고, 동맹의 고천제의는 봄, 가을 혹은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고비에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드린다. 동시에 그 신성한 제수의 음복을 통해 술과 고기와 떡으로 배를 채우고 노래와 춤으로 몇 날을 밝힌 배달의 겨레는 분명 축제의 민족이 아닐 수 없다.
3세기경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여러 부족의 생활 상태를 기록한 삼국지위지 동이전과 기타 중국사적의 단편적인 기록들에 의하면 어느 부족사회에서나 1년에 한두 차례의 국중대회를 열고 제천과 아울러 부족의식을 연마하고 가무백희를 연행하였다고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의 원시적 축제를 볼 수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춘추제 등을 그 대표적인 고대 제의로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연일음주가무 또는 주야음주가무하는 축제였으나, 아직 의례에서 분화되지 않은 단계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제천의례의 전통은 국가적 행사인 공의로서와, 민간의 마을굿(도당굿, 별신굿, 단오굿, 동제 등)의 두 갈래로 전승되어 오면서 우리나라 축제의 맥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벤트(축제)의 전통은 삼국통일을 거쳐 고려, 조선조를 지나 개화기, 일제의 침탈기, 그리고 해방이후의 이념적 대립과 6.25를 거쳐 오늘날 근대화, 산업화,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면면히 살아 있으며, 민족문화, 전통문화의 수맥으로서 그 정신을 시들 줄 모른다. 조선조의 유교문화는 가난과 근엄의 도덕윤리로 축제의 난장판을 규제하려고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축제의 공동체의식을 두려워하여 자기 나라 축제는 지원하면서 우리의 축제는 미신행위로 탄압하였다. 해방이후의 경제적 핍박과 6.25전쟁의 참화는 민족문화와 전통의 축제에 대한 기반을 거의 허물어 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근대화와 산업화과정에 드러나는 기계화, 도시화, 획일화는 축제의 천적이었다.
국가적인 공식의례의 쇠퇴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이민족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극대화되었다. 민간행사로 전승된 세시풍습의 민속, 향토 축제 또한 극도의 소외로 사라질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이민족에 의한 정책적 탄압에다 배달민족 자체의 시대정신, 이른바 미신타파라는 이름의 계몽주의와 1960년대식 근대화과정에 있어서의 서구식 합리주의, 과학만능사상에 의한 것이다.
모진 역사의 시련을 겪고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한국의 향토, 민속축제 가운데서 1970년대 공식적으로 정부지원을 받은 축제는 27개였다. 그 축제들은 문화제라든가 예술제라는 이름을 혼용하고 있다.
이민족 지배하의 20세기 초반, 그리고 근대화, 산업화가 급격히 휘몰아치던 6.70년대에 전승된 향토.문화축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속에서 민족문화의 핵심으로서 그 축제정신은 가장 치열하게 그 불씨를 지켜 나온 셈이다.
향토.민속축제는 오늘날 그 기능과 구조의 변모를 강요당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축제 대신에 정보산업화 사회에 맞게 외현의 변화를 인공적으로 강요당한다. 향토.민속의 자연축제와 나란히 인공축제의 세계화가 타진되고 있는 오늘날, 엑스포 ‘93의 문화행사, 97세계연극제, 98경주 문화엑스포 행사 등에 기획된 거리축제가 마련되어 축제행렬과 엑스포, 길놀이, 마당놀이 등이 구상되고 국제 민속축제 경연과 전통예술 공연의 무대화가 마련되게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우리나라 이벤트는 1960년대 들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최초의 근대이벤트로 1926년 한국 최초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국가의 최우선 정책이 경제부흥에 초점을 맞추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정부주도로 경제부흥을 실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공업화와 수출에 의존한 수출, 경제부흥이 중심개념이었으므로 스포츠, 문화이벤트를 시행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였고, 공산품 중심의 산업전시회 정도의 이벤트가 행해졌다. 1962년에는 국가재건과 경제부흥을 도모하기 위한 산업박람회가 개최되었고, 공산품 제조업중심의 전문전시회 또는 산업박람회 형태의 행사가 개최되었다.
산업전시회를 전문적으로 개최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우리나라에 1979년 3월 한국종합전시장이 개관되어 국제규모의 전시회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각 산업부문의 국제전시회가 한국종합전시장을 중심으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경제부흥정책에 따라 우리나라는 198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안정 기반을 확보하였으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 시기에 불안정한 정치적 배경을 안고 있던 정부는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주도형 정치, 문화이벤트인 ‘國風 81‘을 개최하게 된다. 이는 일반국민의 정부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형성시키는 목적을 가진 이벤트였으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전국규모의 첫 번째 문화이벤트로서의 이미를 갖기도 한다.
1970년대 말에 이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SITRA82(서울 국제무역박람회)와 같이 부역부문에 초점을 맞춘 산업전시회는 계속 이어졌으며, 문화이벤트 개최 및 국제회의의 유치 등에도 노력을 경주해 우리나라도 국제이벤트를 개최하는 초기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