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당을 통해 본 남조계 요소와 북조계 요소

 1  백제와당을 통해 본 남조계 요소와 북조계 요소-1
 2  백제와당을 통해 본 남조계 요소와 북조계 요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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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와당을 통해 본 남조계 요소와 북조계 요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제는 武寧王~聖王 양대에 걸쳐 중국 남조와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펼쳤다. 이는 宋山里 6號墳에서 출토된 "梁官瓦爲師矣"라는 명문전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살필 수 있다. 특히 남조에서 유행하였던 塼築墳은 무령왕릉의 축조 뿐 아니라 웅진도읍기의 드림새 문양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南京市 油房村 南朝大墓에 사용된 전 문양과 무령왕릉에 축조된 전 문양을 비교하여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梁普通二年八月七日定干양 耶郡臨沂縣"명 묘지석이 발견된 남경 燕子 墓는 무령왕릉 내부의 배수구와 벽감, 그리고 왕릉 축조에 사용된 문양전과 동일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대문산묘, 연자 묘, 판교묘, 화신묘 등과 같은 梁墓들의 경우도 축조기법, 연화문전, 벽감 등에서 무령왕릉과의 친연성이 확인되었다.
무령왕릉이나 남조 양묘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살필 수 있는 주문양은 연화문인데, 특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원형돌기식 연화문전은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살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문양으로써 양과의 문화 교류 속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2. 百濟瓦當의 中國 北朝系 要素
사비천도 즈음인 6세기 전반기, 당시 공주지역에는 중국 남조계의 원형돌기식 와당이 폭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여지역에서는 이러한 와당 외에도 瓣端이 尖形인 연화문 와당이 일시적이나마 龍井里寺址에서 거의 동시기에 사용되었다. 이 瓦例는 원형돌기식 와당과 비교하여 화판의 형태, 중방의 크기, 원권대 등에서도 상이함을 찾을 수 있다. 용정리사지 출토 판단첨형 와당은 남조계로 대표되는 원형돌기식 와당과는 다른 북조계의 와당으로 판단되었다. 용정리사지는 전반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체의 가람배치는 살필 수 없지만 금당지와 목탑지는 부분적이지만 조사가 완료된 바 있다. 금당지는 층위상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되었으며, 판단첨형의 연화문와당은 두 층위 중 하층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연화문와당은 용정리사지를 제외한 백제시대 어느 유적이나 고토에서도 출토된 바 없다. 아울러 제작기법 측면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유행하였던 원형돌기식 와당과 판이하게 다름을 살필 수 있다.
북조의 연화문은 판단첨형으로 세장하지 않고 보상화문 상고시대에 유행한 식물 모양의 장식무늬.
연화(蓮華)무늬에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작품상에 나타난 무늬는 전혀 달라 복잡 화미(華美)하며, 실재하는 꽃이 아니라 우미하게 문양화한 식물의 장식무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꽃잎이 여덟 개이고 끝이 뾰족한 것은 연화무늬와 같지만 좌우의 가장자리가 젖혀지고 또한 내부에 복잡한 곡선적 요소가 가해져 있다. 채색된 것은 햇무리처럼 여러 층으로 농담(濃淡)이 져 있다.
아마도 수(隋)나라에서 당(唐)나라 초기에 걸쳐 출현된 것 같은데, 성당시대(盛唐時代)에 유행하여 둔황천불동[敦煌千佛洞]의 석굴 천장에 아름다운 예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방전(方塼) 등에서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남조 요소를 보이는 원형돌기식 와당의 융기된 소주문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화판과 비교해 중방의 크기가 큰 점, 화판사이의 간판이 역삼각형이 아닌 마름모형이라는 점도 하나의 특징으로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여러 특징들은 당시 유행하였던 웅진도읍기의 판단융기형 혹은 원형돌기식의 와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양이다. 뿐만 아니라 용정리사지 출토 와당은 당시의 모든 백제 와당에서 확인되는 판구와 주연사이의 원권대가 없어 製瓦技法상에서도 완전히 구별됨을 보여주고 있다.
3. 結語
중국의 남북조문화는 당시 삼국보다 선진문화였기에 導入의 주요대상이었고, 백제도 이들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백제가 남조문화를 도입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기사나 무령왕릉 출토 유물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제가 북조문화를 도입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선 그 동안 남조문화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定林寺址에서 출토된 陶俑, 佛像 그리고 武零王陵 誌石과 “昌王...”銘사리감 등에 쓰여진 書體 등을 북조문화의 영향으로 파악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연화문 와당
와당(암막새)
와당(전)
종류별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