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철학의 두 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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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당대철학의 두 조류
1. 배경
『춘추』의 전문가인 동중서가 B.C.136년에 한漢무제에게 육경六經을 제외한 모든 서책들의 유통을 금지시켜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을 때 유가는 중국의 역사상 특별히 존숭받는 지위를 향유하게 되었다. 한무제가 이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장군매 지음, 김용섭 장윤수 옮김 『한유에서 주희까지』 형설출판사 1991 p.20~21
유가경전이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된 이후로 유가 철학은 날로 형식화되어 원래의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그 이후로 유가는 두 개의 가지로 분리되었다. 하나는 국가가 박사관을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경서를 강해할 때 사용된 경전인 금문今文을 준봉하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오래된 문체로 쓰여진 경전인 고문古文을 준봉하는 경향이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서로 갈등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도교와 불교가 대중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장군매 지음, 김용섭 장윤수 옮김 『한유에서 주희까지』 형설출판사 1991 p.23에서 재인용
불교가 중국에 진입되던 시기에 많은 일류 학자들은 비록 그들이 여전히 과거 시험을 위하여 유가 경전들을 암송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가 경전들을 제쳐 놓았다. 중국에서의 불교는 매우 깊고 넓게 전파되었다. 오래지 않아 새로운 불교 신도와 유가 추종자들 간에는 때때로 승려들의 가정생활 포기문제, 승려의 세금과 군복무의 면제문제, 그리고 유가들의 인생을 긍정하는 태도와 상반되는 불가의 공론과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얼마간 소멸되어 보이지 않았으나, 당대 중엽의 한유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생겨났다. 장군매 지음, 김용섭 장윤수 옮김 『한유에서 주희까지』 형설출판사 1991 p.29에서 재인용
2. 한유
(1) 생애
한유韓愈(768~824)는 당나라 최초의 산문가로 간주된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거의 이백 및 두보와 동등하게 평가되며, 철학에서의 업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로서의 위상 또한 매우 크다. 이러한 철학적 위상은 당시 불교에 의해 뒤로 물러나 있던 유학을 강하게 주장하는 그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는 하남의 남양 출신으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호는 창려昌黎이다. 이 호는 그의 가족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하북성 영평부의 거주지에 따라 일컬어진 것이다. 한유는 3살에 이미 부모를 잃고 사촌에게 교육을 받았다. 사촌마저 죽자 그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는데, 그는 그녀를 어머니처럼 섬겼다. 그는 밤새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어 매일 수백 글자를 배웠고, 세 번 낙방한 후에 24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의 관리경력은 매우 변화가 많았다. 그는 여러 번 감등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였다. 최후에 그는 형부시랑과 이부시랑을 지내고 창려의 후侯에 봉해졌다. Alfred Forke 지음, 최해숙 옮김 『중국중세철학사』 예문서원 2012 p.433
(2) 사상
- 한유의 천인사상
한유가 유종원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하늘에 대한 설을 아는가? 내가 그대에게 하늘의 설을 말하겠다. 지금 병으로 고통 받고, 고달프고 서러우며,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르며 이렇게 한탄할 것이다. ‘백성을 착취하는 사람이 오히려 창성하고 백성을 돕는 사람들은 재앙을 당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모르는 것이다. 과일이 썩으면 벌레가 생겨나고, 인간의 혈기가 거슬리고 막히면 등창이나 종기 또는 벌레가 생겨나며, 나무가 썩으면 전갈이 생기고 식물이 썩으면 반딧불이 날아오른다. 어찌 썩은 것이 없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있겠는가? 사물이 썩으면 벌레가 거기에서 생겨나며, 원기와 음양이 썩으면 사람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벌레가 생겨나면 사물은 더욱 빨리 썩는다. 벌레는 사물을 먹어서 구멍을 뚫음으로써 완전하게 사물을 부패시킨다. 인간이 원기와 음양을 해치는 것은 또한 매우 심하다. 언덕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산의 숲을 베어 내며, 샘을 파서 우물물을 마시고, 무덤을 만들어 죽은 이를 보내는 등 천지와 만물이 정을 얻지 못하도록 고통을 가한다. 인간이 원기와 음양을 해치는 것이 벌레가 하는 것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하늘을 알지 못하여 하늘을 부르고 원망한다. 나는 하늘이 그들의 부름과 원망을 듣게 되면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고 화를 입힌 사람에게는 큰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Alfred Forke 지음, 최해숙 옮김 『중국중세철학사』 예문서원 2012 p.441~443에서 재인용
한유에 따르면 자연을 가장 적게 해친 사람은 공이 크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게 되고,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 사람은 반대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그들 자신에게 가해진 피해에 대하여 복수하는 신이다. Alfred Forke 지음, 최해숙 옮김 『중국중세철학사』 예문서원 2012 p.444
- 한유의 불교배척 : 배불진유사상
한유는 불교를 매우 싫어했다. 한유는 일생을 불교와 도교 등 이단을 배척하고 스스로 맹자 이래로 끊어진 유학의 도통을 자임하며 옛 성현의 도를 담아 교화를 이룩하는 것을 그의 문학관으로 삼았고, 분열을 반대하고 불교와 도교를 반대하는 것은 역사발전에 부합하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 번진의 할거, 환관의 권력남용을 반대하는 등의 주장을 하였는데, 한유의 정치사상과 문학주장의 주요 배경은 당시의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한유는 이런 상황을 극도로 증오하며, 일생동안 불교를 배척한 그의 주장을 관찰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리고 전력을 다해 충고하여 제지하여 그 언사가 날카롭고 태도는 단호하였다. 한유는 불교와 도교를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착취의 확대라고 주장 하였다. 는 사상 정치적 관점에서 불교가 ‘오랑캐의 법’이라 지적하였는데, “선왕의 법언을 말하지 않고 선왕의 법복을 입지 않으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간의 정을 모르는” 것과 ‘선왕의 도’는 결코 화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상고시대 불교가 없다가 漢代(한대) 불법이 처음 중국에 들어온 이래 “그 후 혼란이 계속되니 시운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남북조 황제들이 “불교를 섬기며 행복을 추구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화를 입었다”는 것을 들어 “불교가 섬길 것이 못된다”고 증명 하였다. 憲宗(헌종)이 불골을 맞이하고 모든 사찰이 차례대로 그것을 맞아 공향하게 한 것은 백성들이 “정수리에 향을 불사르고 손바닥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는 등의 신자의 고행을 행하고, 수백 수입이 떼를 지어 의복을 벗어내고 돈을 모아서 시주함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고, 서로가 본받아 오직 늦을세라 걱정하여 노소가 세차게 달음질쳐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리고 마는 상황을 초래하고, “좋은 풍속을 깨고 사방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또 불골은 “썩어 불결한 물건”이며, 이 불골을 “맡아보는 관리에게 분부하시어 물이나 불속에 던져서 근본을 영원히 끊을 것”을 요구했다. 또 “부처가 만일 신령스러움이 있어 재앙의 전조를 지을 것 같으면 닥쳐오는 재앙을 모조리 신의 몸에 받겠다”라고도 하며 불법을 근복적으로 부정하였다. 韓愈 『論佛骨表』 “其後亂亡相繼, 運祚不長.”, “事佛求福, 乃更得禍.”, “焚頂燒指, 百十\爲群, 解衣散錢, 自朝至暮, 轉相?效, 惟恐後時. 老少奔波, 棄其業次.”, “傷風敗俗, 傳笑四方.”, “付之有司, 投諸水火, 永絶根本{.”, “佛如有靈, 能\作禍?, 凡}有咎殃, 宜加臣身.”
3. 유종원
(1)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