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 그가 역사에 남긴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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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그가 역사에 남긴 빛과 그림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1월 6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우선 그에 대한 호칭마저도 온전치가 못하다. 민비? 명성왕후? 혹은 명성황후? 그 어느 경우도 우리에게 흡족한 해답이 아닌 듯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시해된 지 2년 후에 追尊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사용코자 한다. 그것이 비운에 간 그녀에 대한 예우요,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도 하겠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문호개방은 자주적인 입장에서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시련을 수반하고 있었다. 개항전후의 조선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궁핍, 그리고 사상의 혼돈 등 전통사회의 내재적 붕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한 가운데 명성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녀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 대원군과의 갈등과 정치적 궤적, 그리고 명성황후에 대한 또 다른 평가 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I . 명성황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
역사의 라이벌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서로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나 각자의 위치에서 탁월한 능력과 결단력으로 시들어 가는 조선왕조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살려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왕조의 몰락을 재촉한 비극의 한 가운데서 역사의 조명을 받게 되었음은 잘 알려 진 바와 같다.
純祖 즉위(1800) 이후 3대 60여 년에 걸친 외척의 발호와 전횡으로 인한 세도정치는 국정의 난맥상을 드러냈다. 온 몸으로 이를 체험한 왕손 李昰應은 유명무실해진 왕권회복을 위해 切齒腐心, 시정에 엎드려 기회를 엿보다 철종이 後嗣없이 승하하자 어린 아들 命福을 내세워 왕위를 승계하는데 성공하고(1864, 고종즉위), 2년 뒤에는 驪興 민씨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딸-민아영은 8살에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 대원군이 가장 경계하는 세도정치의 발호를 예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왕비로 간택된 16살의 민아영은 이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지만 이들의 숙명적인 악연이 이에서 비롯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정적들-대원군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趙大妃 세력, 원로대신 세력, 안동 김씨 세력, 유림세력-을 은밀히 규합하고 유림의 선봉장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상소를 계기로 그를 하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無所不爲의 막강한 힘의 상징이었던 대원군이 深慮遠謀 끝에 간택한 자신의 며느리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대원군을 실각시킨 명성황후는 민씨 戚族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어(1876) 최초의 근대적 개항을 함으로써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뒤집었다. 그러나 조선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근대적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체의 역량이 부족한 징후를 곳곳에서 나타냈다. 옛 것을 고수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은 쇄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개항 자체에 극력 반대하였고 집권층도 근대화를 추진시킬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實情이었다. 서구문화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부족했던 민씨 정부는 親淸事大로 흐르게 되고 청의 지원을 얻은 민씨에 의해 개화의 꿈은 잠시 물밑으로 갈아 앉는 것 같았다. 이후 20여 년간 국내외의 이해세력과 침략적 서구열강들의 복잡 미묘한 사건들에 직, 간접으로 관계되고 이용되며 이들은 부침을 거듭했다.
II . 명성황후와 대원군과의 갈등과 정치적 궤적
그러나 명성황후는 외교적 국면에 매우 기민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제 명성황후가 취한 외교적 수완을 적시해보자. 1885년 영국에 의해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Mollendorf)를 파견한 왕비는 영국과 더불어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도 유연하게 조정, 유지해나갔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소용돌이를 틈타 재빨리 뛰어든 일본은 미개를 문명시킨다.는 구호아래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침략적 야심을 간파한 명성황후는 일본의 배후에 있는 개화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親러시아 정책을 내세우고 노골적으로 일본과 관련 세력들에게 대항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침략의 기세가 오른 일본을 견제해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여러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하였다. 소위 3국 간섭이 그것이다. 열강의 압력에 변화된 자세를 취하는 일본의 태도를 감지한 민씨 정부는 더욱 親러정책을 강화해 갔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씨와 親러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을 장악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된 일본은 마침내 권력의 핵심인물인 왕비를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획책하기에 이른다. 즉 일본은 이노우에(井上馨)공사를 소환하고 대신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三浦梧樓)를 공사로 파견해 극비리에 왕비제거 작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일본은 때마침 解散說로 민씨 정부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의 간부들을 끌어들이고 거사일 새벽 대원군을 위계로 종용해 浪人輩를 앞세워 궁성을 공격했다.
1895년 11월 6일(음력 10월 8일) 새벽, 궁성으로 난입한 일본공격대는 저항하는 시위대와 책임자(이경직), 그리고 대신들을 거침없이 사살, 살해하고 왕과 왕세자를 협박하고 위해하며 마침내 왕비의 침전에 난입했다. 그리고 폭도들은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시해하는 야만적 暴擧를 자행하니 참으로 치욕적이고 서글픈 역사의 한 순간-을미사변이었다. 당시 왕비 시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小早川秀雄)의 회고록에 의하면 일본이 너무 충실하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했기 때문에 민비는 그러한 간섭을 싫어하고 조선왕실에 대해 환심을 사려고 애쓴 러시아에 더 의지하고 싶어했다.…… 러시아와 조선왕실이 굳게 손잡고 온갖 음모를 추진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一刀兩斷, 그 한쪽의 손을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다.
즉 왕실의 중심인물인 민비를 제거하는 외에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고 민비 시해의 정치적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침략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왕비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다. 이 때 왕비의 나이는 45세였고 정부의 친일정책으로 잠시 폐비까지 되었으나 곧 복위되어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완전히 타의에 의해서 신분의 극대화가 이루어졌고 또한 타의에 의해서 참혹하게 삶을 마감한 극과 극의 여인, 45년이라는 짧은 비극의 생애를 살았던, 그러나 굵고 파란만장한 삶을 누린 여인, 명성황후-민씨에 대한 기록은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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