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인재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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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인재경영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의 인재경영
세종실록 5년(1423년)11월 25일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것이다.”
국가경영의 핵심은 인재양성과 제대로 된 인재등용
세종실록 14년(1432년)8월 2일
“그 사람이 어질다면 비록 사립문과 개구멍에 사는 천인이라도 공경이 될 수 있다.”
세종실록 14년(1432년)5월 1일
“장리(贓吏),즉 뇌물죄나 횡령죄를 범한 관리의 자손일지라도 진실로 현능(賢能)하다면 등용하게 하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귀천 및 출신성분에 구애 받지 않는 능력위주의 인재관.
-인재의 장점과 단점을 적절하게 취할 줄 알았고 인재의 허물을 감싸서 인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포용의 인재관.
세종의 인재관
세종의 인재 검증 시스템
1단계 정가간택(精加揀擇)
어떤 관직에 사람을 임용할 때 조선시대 관리 등용의 실무자인 이조(吏曹)의 낭관(郎官)으로 하여금 매우 정밀하게 간택하는 단계(경력, 자질, 부패, 가족관계 등)
2단계 경여평론(更與評論)
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하여 그 후보자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더 나은 적임자는 없는지에 대해서 내부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격렬히 토론하게 한다.
3단계 중의(衆議)
고위 인사의 경우 인사를 주관하는 부서의 ‘적합 판정’에도 불구하고 조정 안팎의 의론이 좋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 하에 반드시 “중의(衆議)가 합한 연후에야 임명하도록한다.(衆議孚同然後任之)”는 원칙으로 인사등용 과정에서 행여라도 발생할수 있는 이조 내부의 부조리를 원천적으로 방지하고 이조 밖의 다양한 의견을 통해 철저한 인재검증을 통한 인재등용 시스템을 갖추고자 하였다.
파격
장영실 : 세종 시대는 물론 조선 최고의 과학자.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세종의 근대적 인재등용의식
실력에 근거한 인재 발탁의 대표 사례
: 신분제 사회의 조선 사회에서 노비 출신 이며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 6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고 중국 유학을 통해 이슬람 과학 도입
능력위주의 근대적 인재등용 의식
중국유학 파견과 같은 벤치마킹의 인재양성과정
참고문헌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네이버 http://www.naver.com
KBS 역사스페셜 세종, 조선을 업그레이드하다 http://www.kbs.co.kr/1tv/sisa/hdhistory/vod/vod/1394047_13796.html

[세종처럼], 박현모, 미다스북스, 2008.
[위대한 CEO 세종대왕], 전경일, 한국경제신문사, 2004

강문식, 세종의 인재경영과 집현전 ,선비문화 13권, 2008.
김덕원, 대왕 세종의 인재 경영에 대한 연구, 2008
1
김윤수 - 여진족 침입 시, 보고 의무 태만으로 탄핵에 몰렸으나 허물을 감싸주어 실제 한달 후에 큰 공28) 을 세웠음
윤회 - 지나친 음주로 술이 취하면 인사불성이 되어 행동하였으나 허물을 감싸고 재능을 높이 인정함
최윤덕 - 변방 근무 중 실수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북방 수호 임무를 맡겼음
8
공적으로 허물을 감싸는 기단취장(棄短取長)의 인재활용 - 세종시대는 물론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영의정 황희
하지만, 세종의 포용의 인재경영이 없었다면 조선 최고의 영의정이라는 수식어는 없다.
세종의 인재경영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황희다. 황희는 원래 청백리 정신이 뿌리깊게 박힌 사람도, 흠 없이 올곧기만 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노비인 서얼신분으로 관직에 나갔고 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감독해야 하는 대사헌의 자리에서 뇌물로 ‘금’을 받기도 했으며 간통사건까지 얽혀 사연이 복잡하기 그지 없는 ‘죄인’인 그를 세종은 등용한다. 특히 자신이 충녕대군으로 있을 때 왕위등극을 반대했던 사람이 황희였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세종이 황희를 발탁하여 곁에 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결국 황희는 자신을 믿어준 세종을 전심 전력으로 모시며 비로소 그는 비가 새는 집에 앉아서 우산을 쓰는 ‘청백리 재상’으로 거듭났다. 또한 세종 14년 겨울 파저강의 여진족이 침공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여연군 군수 김윤수가 탄핵되었을 때 세종이 한 말은 세종 리더십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人情)이란 잃었던 직임職任을 그대로 다시 주면 그 전의 허물을 벗기 위해 마음을 고치는 것이다.” - 144p, 『세종실록』 세종17년 6월 17일
한 달 후 김윤수는 철저한 대비와 협공으로 여진족을 완벽하게 무찔렀다. 게다가 측우기와 해시계를 만들어낸 장영실은 어떤가. 그는 관노의 신분이었다. 순전히 그의 강점인 재주만 보고 관직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 밖에도 관직에 오르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던 많은 죄인과 노비들에게 관직을 주고 그들의 재능을 믿어주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세종은 새로운 삶을 열어준 하늘 같은 임금이었고 말 그대로 ‘성은이 망극’할 수 밖에 없었기에 나라 일이라면 발벗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진흙탕의 혼탁함을 보지 않고 그 속에서 피어나게 될 연꽃의 가능성을 보았던 세종, 그는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진정한 리더였다.
황희 , 우리는 이분을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 꼽는다. 청백리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이분은 청백리가 아니다. 뇌물 수수 , 간통 등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많은 공직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황희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의 재주를 끌어내는 포용의 리더십으로 조선을 이끌었다. 문제가 많은 공직자 , 오늘날 인사 청문회를 했다면 무조건 낙마 대상인 황희가 세종에 의해 잠재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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