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중세사 - 중국과 한국 - 고구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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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동양중세사
1. 중국의 한국사 왜곡
중국의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1877년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으로 시작됐다. 이로부터 약 20년 동안 중국 학자들 손에 의해 ‘호태왕비고증(好太王碑考證·1887년)’ ‘호태왕비석문(好太王碑釋文·1889년) ‘고구려영락대왕비가고(高句麗永樂大王碑歌考·1895년)’ 같은 책이 출간됐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만주 지역이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소수 민족 연구가 금기시되는 바람에 고구려 역사 연구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한국사에 포함시켜 ‘삼국시대(三國時代)’로 파악했고, 각급 학교 역사 교과서 또한 이런 관점을 채택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고구려사는 중국사와 한국사에 동시에 속한다”는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론이 장멍산(姜孟山) 류쯔민(劉子敏) 등의 학자에 의해 대두하면서 이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들은 서기 427년 평양 천도(遷都)를 기준으로 만주 지역에 중심이 있던 그 이전은 중국사, 한반도에 중심이 있던 그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고 본다.
하지만 1990년대에 한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부상한다. 리뎬푸(李殿福) 쑨위량(孫玉良) 쑨진지(孫進己) 등은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도 민족 구성이나 정치 성격에 변함이 없었으며, 당시 영토 경계를 기준으로 보면 마지막까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국민적·영토적 통합’이 최대 당면 과제로 대두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 윤 연구위원의 해석이다.
선진적인 동남쪽 연해(沿海) 지역과 낙후된 내륙 지역의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했고, 내륙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들의 위화감이 커져갔다. 중국 정부는 서부 지역과 동북 지방의 균형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이 한족(漢族)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함께 건설한 국가라는 ‘통일적(統一的) 다민족국가론(多民族國家論)’ ‘중화민족론(中華民族論)’을 부각시킴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새 원칙이 채택됐다.
이에 따라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와 유적 발굴이 갑자기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시작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 집대성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최근 태도는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스스로를 ‘고려’ ‘구려(句麗)’라고 불렀고, 중국쪽 역사서에도 ‘고려’가 고구려의 약칭 또는 이칭(易稱·쉽게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중국인조차 두 나라를 연결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들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는 250년이나 차이가 나고 왕족의 성씨(姓氏)나 예속 신민(臣民)의 구성 실태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왕씨가 서한(西漢) 당시 낙랑군의 귀족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왕건은 한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며 고려 태조 왕건이 한민족이 아닐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현재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과거의 역사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고위금(以古爲今)’의 전형적 사례 “윤휘탁(尹輝鐸)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인용
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사와 관련된 중국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