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아니면 생태론적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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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유냐 존재냐 아니면 생태론적 존재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소유냐, 존재냐 아니면 ‘생태론적 존재’냐?
서론 : 무엇이 문제인가 - 끝없는 소유욕, ‘소유’ 중심의 역사
요즈음에 들어서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나 자연환경에 대한 위험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원래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위험도가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니컬 하게도 그에 대한 원인 문명 특히 현대의 물질문명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문명과 기술의 발전은 분명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것은 자연에 종속된 존재로서의 객체에서 자연을 이용하고 소비하는 주체로의 변화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격상은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그것은 ‘자연과의 단절’ 이다.
혹자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대를 일컬어 ‘야만의 시대’라 불렀다. 여기서 ‘야만’ 이라는 말은 세계와의 일치감 잃은 시대를 역설적으로 비꼰 것이다. 이는 자연과 인간 자신간의 일치감을 잃고 자신의 모태를 놓쳐 혼돈으로 접어드는 문제에 봉착함을 경고한 셈이다. 인간이‘문명의 시대’를 지나 ‘풍요의 시대’를 맞고 있다지만 그 시대는 곧 ‘야만의 시대’와 겹치는 역설적인 시대다. 문명의 시대, 풍요의 시대를 왜 야만의 시대, 인간 상실의 시대라고 일컫는 것일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한다. 인간의 조건이 위험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말살될지도 모르는 환경 위기, 생태 위기, 과학 우위의 시대, 그리고 위험의 시대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원용진의 미디어이야기] 환경과 인간 주체, 원영진(글), 미디어 오늘, 2008년 11월 28일자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야만의 시대’를 낳은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본연의 조건이 바로 ‘문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문명’의 위기가 ‘문명’ 자체로 오지는 않았다고 본다. 문명은 분명 기형적인 형태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문명의 기형적 발전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소유 중심의 역사’ 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있는 것이다. 18세기의 자본주의는 분명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지만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서 경제 행위가 윤리 및 인간의 가치와 분리되게 되는 불행을 낳았다. 에리히 프롬 [존재냐 소유냐], 차경아(역), 까치글방, 2002. 서론
인간의 가치와 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신’과 ‘물질’의 분리, 다시 말해 ‘정신’과 ‘문명’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과 사회를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존재’보다‘소유’에 집착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소유에 대한 열정은 결코 끝남이 없는 계급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에 따른 ‘소유 전쟁’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에리히 프롬 [존재냐 소유냐]. 차경아(역). 까치글방. 2002. 서론
그리고 그러한 소유전쟁이 오늘날 다가오는 환경재앙의 맹아가 아닌가 싶다.
본론
1. 소유지배, 자연과 환경의 자본에의 종속
개인적 차원에서 소유에 의한 지배 현상은 인간에 대한 실존적 물음마저 배제시켜 버렸다. 개별 인간에도 소유지배, 적자생존은 자명한 가치가 되었다. 그것은 "능력" 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받기 시작했다. 소유경쟁의 논리가 상식화 될수록 개별개인의 생존을 위한 분리는 더욱 심화되어 결국에는 나 이외의 아군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어느새 사람들의 보편적인 속성이 되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나누어 갖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낳은 인간성 상실에 대한 고독을 사람들은 기껏해야 소비행위로써 풀고 있을 뿐이다 에리히 프롬 [존재냐 소유냐]. 차경아(역). 까치글방. 2002. 페이지 44쪽
. 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있어 여가와 소비가 동의어가 되면서 그의 말대로 시간은 더 이상 창조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즉 소비와 소비 집착에 대한 의미 없는 시간만 흐를 뿐이다.
소유 집착이 낳은 소비 지향은 ‘자연’과 ‘환경’마저 물상화 시켜 버렸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관광” 이라는 산업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관광 역시 현대인의 소비욕구와 자본가의 이윤추구를 위한 상품으로 존재하며 상품의 교환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연이 여러 가지 미적 형태로 조작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연과 생태 자체도 이제는 자본에 종속되어 버린 지 오래다.
참고문헌
< 참고자료 >
1. 에리히 프롬 [존재냐 소유냐], 차경아(역), 까치글방, 2002
2. 제레미 레프킨 [육식의 종말], 신현승(역), 시공사, 2002
3. 원용진의 미디어이야기] 환경과 인간 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