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멜란히튼Philipp Melanchth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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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필립 멜란히튼 (Philipp Melanchthon 1497-1560)
독일의 인문주의자·종교개혁가·신학자·교육자.
멜란히튼은 루터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를 썼다. 마르틴 루터의 친구로 루터의 견해를 옹호했다. 1521년 최초로 종교개혁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 〈신학요론 Loci communes〉을 출판했다. 학문적인 역량을 평가받아 학교 설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고, 결국에는 여러 대학교를 설립·개혁함으로써 독일 교육제도 전체를 실질적으로 재편성했다.
초기생애와 교육
멜란히톤은 부모 바르바라 로이터와 게오르크 슈바르체르트로부터 깊은 신앙심을 물려받아 평생 그것을 간직했다. 고향 브레텐(1504년 5명이 마녀 혐의로 화형을 당한 지역)에서부터 신비종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후에 별·꿈·귀신들에 대한 성서의 언급과 연결되어 그는 점성술과 귀신론의 확고한 신봉자가 되었다. 1508년 불과 11일 사이에 할아버지 로이터와 4년간 앓던 아버지를 모두 여의었다.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를 가르친 사람은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종조부 요하네스 로이힐린이었다. 그는 멜란히톤에게 라틴 및 고전문학에 대한 애정을 심어 주었다. 포르차임 라틴 학교에서 심도있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 슈바르체르트라는 독일 이름과 같은 뜻의 그리스어인 멜란히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1509~11, 문학사학위)와 튀빙겐대학교(1512~14, 문학석사학위) 시절에는 스콜라 사상을 깊이 탐구하면서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루돌프 아그리콜라의 수사학, 영국의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의 유명론(唯名論), 교회 개혁가 베젤의 요하네스의 사상에 몰입했으며, 성서를 연구하고 동료 학생들과 함께 고전문학을 읽었다.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고전학을 강의해 좋은 평판을 얻었고, 아울러 여러 판을 거듭한 〈초급 그리스어 Rudiments of the Greek Language〉(1518) 문법책을 비롯해 6권의 책을 펴냈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칭찬받으면서 그의 이름은 영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멜란히톤은 당시 최고의 인문주의 전통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1518년 로이힐린을 통해서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첫 그리스어 교수로 초청받아 부임한 지 4일 만에 학문의 향상이라는 연설을 통해 신학과 사회를 갱생하기 위해서 인문주의 계획을 과감하게 실행하고 고전과 그리스도교 원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루터와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멜란히톤은 서로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주고받는 사이에 우정이 깊어갔다. 멜란히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에 95개조 격문을 걸어놓음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종교개혁 진영에 마음을 다해 헌신했다. 1519년 말에는 이미 루터의 대적 요하네스 에크에 맞서 성서의 권위를 옹호했고, 루터보다 먼저 화체설(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이나 실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을 배척했으며,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주장을 자기 신학의 중추로 삼았고, 로이힐린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끊어버렸다. 이 기간 동안 전보다 페이지 수가 적은 7권의 책을 써냈고,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열정은 대단해서 하루 일과를 새벽 2시 강의로 시작했는데 6시에 600명이나 되는 학생들에게 강의하기도 했다. 카타리나 크라프에게 구혼한 끝에 결혼해 안나·필리프·게오르크·막달렌 등 4명의 자녀를 낳았다.
루터의 권유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에 대해 강의했고, 1521년 최초로 종교개혁 원칙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 〈신학요론〉을 펴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죄·율법·은총 등이었고 그밖에 자유의지·맹세·소망·고백 등 여러 가지 교리들을 다루었다. 그는 성서에 근거해 죄가 외적인 행위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죄는 사람의 이성을 넘어서 의지와 정서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사람은 선행을 하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인정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원죄는 타고나는 성향으로, 모든 사람의 행위를 더럽히는 무질서한 자기집착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죄는 용서받으며, 그 경우 사람의 행위는 비록 완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응답이라고 했다. 〈신학요론〉은 발행 첫해(1521)에 3판까지 나왔고, 1525년까지 18판이 발행되었으며, 독일어 번역이 나왔고 1558년 최종판에는 많은 증보와 수정을 가했다. 루터는 〈신학요론〉이 성서의 정경에 포함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공언했다. 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는 그 책을 필독서로 정했고,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그 책을 다 외워 신학에 대해 토론을 할 정도가 되었다.
1521년 그는 루터 지지자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소르본대학교가 루터의 104개 진술을 단죄한 것에 대해 파리 신학자들의 사나운 포고령에 반대하며라는 글로 예리하게 답변했다. 같은 해에 나온 〈그리스도의 수난과 적그리스도〉에서는 루카스 크라나흐(1472~1553)의 목판화를 이용해 교황의 생활 방식이 그리스도와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멜란히톤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강의록 출판을 주저하자 루터는 원고를 몰래 가져다가 1521년 "당신의 이 주석들을 발행하는 사람은 나(루터)이며, 이제 당신(멜란히톤)에게로 돌려드립니다"라는 서문을 써서 출판했다. 1523년 루터는 멜란히톤의 〈요한의 복음서〉 주석을 똑같은 방법으로 출판했다.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 종교개혁파의 지도자였다. 개혁파를 위한 임시 평화안을 마련한 제1차 슈파이어 의회(1526)가 끝난 뒤 멜란히톤은 개혁신앙을 받아들인 제국의 영주들을 방문하고, 교회 헌장을 작성할 28명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래서 1528년 교회 헌장 대표들을 위한 교훈서인 〈방문자들을 위한 지침서 Unterricht der Visitatoren〉를 출판했다. 이 책은 종교개혁 교리진술과 초급학교 교육개요를 담고 있는데, 작센에서는 이 내용을 법률로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공립학교를 설립했다. 독일 전역에서 멜란히톤의 교육계획을 모방했으며, 56개가 넘는 도시들이 그에게 학교 설립을 위한 자문을 구했다. 그의 직접적인 도움과, 그가 쓴 교과서, 그가 양성해낸 교사들을 통해서 결국 독일의 모든 교육제도는 재구성되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예나·마르부르크 등의 대학교 설립을 도왔으며, 그라이프스발트·비텐베르크·쾰른·튀빙겐·라이프치히·하이델베르크·로스토크·프랑크푸르트 등의 대학교를 개혁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는 독일의 스승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후기 생애
루터가 죽은 다음해, 즉 뮐베르크 전투(1547)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큰 타격을 입은 듯했던 상황에서 아우크스부르크 가협정이라는 잠정적인 조약으로 프로테스탄트 진영과 로마 가톨릭 진영을 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멜란히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근본 교리로 인정되기 전에는 협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뒤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훼손하지 않는 원칙들은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할 필요성을 인정했으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의라는 옛 개념을 따르지는 않았다. 7가지 성사를 인정했지만 그 자체로는 구원의 효력을 지니지 않는 단순한 의식으로서만 인정했다. 가신조 협정 때 보인 유화적인 태도 때문에 멜란히톤은 동료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는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벌인 논쟁과 로마 가톨릭 측의 반대자들과 가진 무익한 회담으로 여념이 없었다. 1560년 사망해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의 묘 곁에 묻혔다.
교리 사상
문학적인 역량, 명석한 사고, 우아한 문체 때문에 수많은 회의에서 종교개혁 대변인 및 프로테스탄트 대표자가 되었다. 성찬, 회심에서의 인간의 역할, 선행의 역할에 관한 루터의 입장을 점차 수정했지만 루터와 완전히 갈라선 적은 없었다.
1530년까지 성찬에 대해 루터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이전인 1529년부터 루터와 달라지기 시작해 154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10항은 칼뱅의 성찬 견해와 비슷했다. 그는 또한 회심에서 인간의 역할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처음에는 루터의 핵심사상인 은총교리를 따라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듯했으며, 숙명론에 가까운 아우구스티누스의 불가항력적인 은총교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 Commentary on Colossians〉(1527)에는 예정설에 대한 반대가 함축되어 있었고, 1532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 Commentary on Romans〉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놓고 벌이는 인간의 투쟁을 이야기했다. 〈신학요론〉 1535년 판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선물로 받아들여야 하며,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견해는 〈영혼에 관하여 De Anima〉(1540)에서 명확하게 밝혔다. "하느님이 인도하지만 하느님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인도한다."
멜란히톤은 윤리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선행을 신앙의 필연적인 열매로 강조했다. 루터는 믿음 자체를 성화(聖化)의 원칙으로 삼았으나 그는 율법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었다. 1528년 〈방문자들을 위한 지침서〉에서는 회개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신앙을 고취시키기 위해 율법의 경고를 전하라고 목사들에게 권고하자 율법 반대론자 요하네스 아그리콜라에게 반박을 받았다. 1535년판 〈신학요론〉에서는 선행이 영생을 얻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선행이 신앙인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질서를 중시해 더욱 율법과 도덕적 이상을 강조하게 되었으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믿음에서 선행이 나오기 때문에 선행은 믿음의 필수적인 외적 표현이라는 종교개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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