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인물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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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대통령 인물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이칭별칭 호 우남(雩南)
출생-사망 1875년 ~ 1965년
출신지 황해도 평산
본관 전주(全州)
관련사건 러일전쟁, 105인 사건, 한국전쟁, 4ㆍ19혁명
저서(작품)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 독립졍신, 한국교회핍박
대표관직(경력) 중추원 의관, 초대 대통령
정 의 1875(고종 12) ∼ 1965,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출신.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이고, 아 버지는 경선(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 젊은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젊은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부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교민들 사이에서 독립심과 자립심을 고취시켰다. 일찍이 항전을 통한 대한 독립보다는 외교적 순리에 의한 통일을 생각 하였던 것 같다. 문제는 미국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대한민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청원하는 청원서 제출에 있다. 독립운동의 방향성과 각 독립운동가들의 이념과 생각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또 다른 열강의 힘에 의한 독립이 진정한 독립인지 되짚어볼 필요성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으로서 강력한 반 공산주의태도를 견지하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남북한의 분단을 초래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하는 이념의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는데 기여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비판의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여행권 발급 거부통보를 받기 이틀 전(3월 3일)에 그는 정한경과 공동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하에 한국을 신설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파리행을 포기한 그는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14∼16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여 독립방략을 논의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3월 10일에야 전하여 들은 그는 4월과 5월에 3월 21일에 선포된 노령의 임시정부에서 국무급 외무총장으로, 4월 10일에 구성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그리고 4월 23일에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로 임명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6월에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의 명의로 각국 정부수반과 강화회의 의장에게 한국의 독립을 통고하는 한편, 8월 25일에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치하고 외교활동과 독립자금 모집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9월 6일 상해의 임시정부(약칭 임정) 의정원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그는 상해로 건너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상해 임정 내의 반대세력들의 협조거부로 대통령직을 원만히 수행하지 못한 이승만은 1921년 10월에 개최될 워싱턴 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인의 독립문제를 의제로 상정시키려는 외교활동을 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간 그는 다시 언론·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에서 그는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상해 임정의 의정원에서 1925년 3월 탄핵함으로써 그는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한성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세우며 임시정부 대통령임을 자처하였고, 구미위원부를 활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3년 초 그는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열강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를 환기시켰다. 1941년 12월 진주만사건을 계기로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경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국무성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그는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항일 게릴라전 계획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리고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 총회에서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 임정 대표의 참석권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폈다. 1945년 8월 광복 후 10월에 귀국한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미·소 등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과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자, 그는 1946년 6월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 네이버 사전
- 독학국사(도서출판 일빛)
지은이 박천욱
- 한겨레 신문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기광서 조선대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유영익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차상철 충남대 교수
- 대한민국50년사(도서출판 들녘)
지은이 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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