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본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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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내가 바라본 덕수궁
답사 (踏査)
(유적지나 명승지, 또는 어떤 조사의 대상이 되는 장소를) 직접 가서 실제의 모습이나 상태를 둘러보거나 살펴보는 것 국어 사전, 금성출판사, 1997-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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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접 덕수궁을 가보기로 결심하였다. 이른바 답사를 가기로 했다. 현장에 가서 살펴보고 따져보고 하는 것을 답사라고 한다. 밟을 답(踏), 사실할 사(査)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장소를 직접 가서 현장을 체험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각종 매체의 발달로 더불어 직접 현장을 체험하지 아니하더라도 특별한 지역과 유물에 대한 정보를 쉽사리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는 것과 가상의 간접 체험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직접 보고 느끼고 직접 다니는 사이에 길러지는 안목과 화려한 도판 속 빛깔 고운 모습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직접 느끼는 감흥은 아무리 복제 기술 발달하더라도 비교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 美대사관측은 오는 2006년까지 서울시 중구 정동 10-1번지 덕수궁 터(옛 경기여고)에 지하 2층 지상 15층 규모(연건평 54,976.13㎡)의 美대사관 건물을 신축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현 美대사관저 내부에 54가구 규모의 직원 숙소용 아파트 8층과 군인숙소 4층 등도 함께 신축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각종 언론과 시민 연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근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 덕수궁 옆의 미 대사관 및 직원 아파트 건립 강행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미 대사관측은 대사관저와 숙소용 아파트 등을 묶어 외교공관타운 계획을 진행하면서, 한국의 현행 건축관련 법령을 그대로 적용했을 때의 문제에 대해서 외교관 시설이라는 이유로 예외적용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서울의 5대 궁궐 중하나이다. 그런데 미국 측에서는 자국의 외교적 입장만 강요된 부당한 특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美대사관측은 옛 덕수궁 터인 경기여고 자리에 짓고자 설계하고 있는 신축건물의 연면적은 과거 조선총독부 연면적의 두 배에 가깝다. 자주적인 한 나라의 수도 한 복판에, 이처럼 법을 고쳐서라도 대규모 외교 단지를 짓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우리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이다.
이러한 시사적 논란 가운데 그 동안 잠시 잊고 왔던 덕수궁(德壽宮)을 다시 찾기로 했다. 물론 덕수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서울 시민인 이상 덕수궁은 궁내에 상주하고 있는 미술관을 가기 위해서라든지 아님 각종 사진 촬영을 위해서라도 싫던 좋던 한 두 번 거쳐가던 곳이다. 그러나 그 동안 그 익숙함에 잠시 잊고 있던 그 역사의 현장을 재인식하고 이러한 불합리한 시세에 덕수궁이 어떠한 곳인지를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찾아 가보기로 했다. 더군다나 마침 최근에 서울 미디어 시티 2002라는 미술 전시회가 근처엣 대법원 터에서 열리고 있는지라 겸사겸사 좋은 기회였다.
덕수궁(德壽宮)의 약사
덕수궁은 본래 정릉동(현재 정동) 월산 대군의 구택으로 건립되었다. 월산 대군은 조선 제 9대 성종의 형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대신 부한 재보(財寶)와 귀한 궁전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당시에 신의주로 피신 갔다 돌아온 선조의 임시 행궁으로 사용할 때 경운국이라 명명되었다 그후 광해군 3년 10월에 광해군이 대비를 경운궁에 옮겨 모셨고 인조가 즉위하여 명례궁이라 다시 불렀다.
고종이 경복궁에 있던 고종 년(1850) 10월에 일본 군대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경복궁 내에서 난동과 명성황후 시해의 참변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 고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로 이듬해 2월에 왕태자와 함께 한 많은 경복궁을 떠는 경운궁 근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판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경운궁에 머물게 하였다.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고종은 광무 원년 (1897) 2월에 러시아 공간으로부터 경운궁으로 올멱옴으로서 경운궁은 오래간만에 다시 왕이 임하는 궁궐로 되었던 것이다. 이때 전후하여 중화전을 비롯한 주용 전각들이 세워졌다 그해 10월에 왕은 천진에 고하여 황제라 일컫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쳤으니 경운궁은 최근세 역사상 또 다른 획을 긋는 궁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후 일제의 압력으로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 궁에 칩거하면서부터 궁 이름을 덕수궁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허균, 서울의 고궁 산책, 효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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