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서대문형무소 답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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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사] 서대문형무소 답사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대문 형무소』 답사 배경

2.『서대문 형무소』건물 연혁

3. 일제시대의 『서대문 형무소』, 사건 그리고 인물

1) 항일 의병장
2)『서대문 형무소』 그리고 사건
3)『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했던 애국지사


4. 답사 내용 정리

5. 주제 토의 및 답사 진행과정

6. 답사 후기

7. 기타 사진 자료
본문내용
1. 『서대문 형무소』 답사 배경
서대문 형무소 정문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문제, 과거사규명 문제 등이 여론화 됨에 따라 일제시대 그리고 독재정권 하의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 진실을 담고 있는 곳을 물색하던 중 서대문 형무소가 이에 일치한다고 판단되어 이곳으로 답사 장소를 결정하였다. 또한, 드라마 '모래시계', '토지'와 영화 '친구', '광복절 특사'등의 배경으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가 이용됨에 따라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점 또한 답사지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주위에 있는 사적 제 32호 독립문과 사적 제 33호 영은문 주초, 독립관, 순국선열 추념탑, 3․1독립선언 기념탑 등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2. 『서대문 형무소』건물 연혁
‘서대문 형무소’라는 글씨가 쓰인 정문을 들어가는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렸다. 현대에 살면서 근대와 만나는 계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사 당일인 4월 16일 토요일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온 덕분에 우리조는 운 좋게 처음부터 자원봉사자 분의 설명도 듣고 우리보다 좀 더 어린 세대의 반응 역시 들으면서 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명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벽관
1층은 추모의 장으로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첨단 영상을 통해 조감해 보고, 그 분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보며 그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추모의 장은 크게 영상실, 안내실, 기획전시실, 자료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의 설립과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비롯하여 서대문 형무소 건물 전반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서대문 형무소에 감옥살이를 하신 순국선열들의 업적,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2층 역사의 장은 일제강점기에 선열들이 보여주었던 항일 저항의식을 보여주기 위한 곳으로 민족저항실, 형무소 역사실, 옥중 생활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은 서대문 형무소가 설립된 역사적 배경과 우리 민족의 항일 저항사를 시대적 사건별로 전시하고 있다. 이 곳에서 우리 조원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영상기법을 통해 재현된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 모습이었다. (강우규 의사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에는 일제의 강제병합에 항거하기 위하여 강우규 의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열들이 온몸으로 일제에 맞섰다. 이런 항일 움직임들을 통해 일본의 야만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일본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형식적이나마 재판제도를 실시하였고 때문에 이 때부터 전국적으로 감옥이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역사의 장에서는 이를 대한민국 전도를 통해 표시하고 있다. 형무소 역사실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의 변천과정과 전국 형무소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옥중생활실에서는 겨우 한명이 들어갈 정도의 벽관과 독방의 재현을 통해 당시 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관한 옥중 생활의 실상이 공개되어 있다.

지하 1층의 ‘체험의 장’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기 이전에 ‘추모의 장’과 ‘역사의 장’에서 조사한 내용과 답사가기 전 사전 조사한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녹색으로 표시 된 내에 서대문 형무소가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통칭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제는 강제병합을 앞두고 1907년부터 그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기 위해 당시 화폐 5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현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을 신축했다. 신축했을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80평의 규모였으나 1916년 여사(女舍), 1923년 새 청사와 사형장, 1935년 제1∼6사 (舍) 등이 차례로 신축됨에 따라 1919년 3·1운동 때는3,000여 명을 수감할 수 있는 감옥이 되는 등 그 규모가 점차 확장되었다. 처음 신축했을 당시 전국 8개 감옥의 총 수용인원이 겨우 300명 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 수용인원 500명의 경성감옥은 엄청난 대규모 감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가 지니고 있는 근현대사의 역사적 굴곡은 그 이름의 변천을 통해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경성감옥은 1912년 9월 3일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을 변경한 데 이어 1923년 5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 1945년 11월 21일에는 서울형무소, 1961년 12월 23일에는 서울교도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1967년 7월 7일에는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 현저동 101번지의 서대문독립공원은 서울구치소가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되면서 정부가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옥사 3개동(제 10·11·12옥사)과 사형장을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하게 되면서 개원한 것이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명칭에 있어서도 ‘서대문형무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명칭 중에 왜 하필이면 ‘형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조선총독부는 1919년 3․1 항쟁 이후 문화정치를 펴기 시작했는데 1923년 5월 5일 감옥의 명칭을 형무소로 개칭한 것도 감옥이라는 명칭보다 형무소라는 명칭이 더 부드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형’(刑)이라는 문자에는 ‘살’(殺)이라든가 ‘초’(剿)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형무소는 사형집행소의 의미로도 해석된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 일제시대편, 나남출판, 2000,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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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바라본 붉은 색 담장마루
현재는 유관선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인 일명 ‘유관순굴’, 윤봉길 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로 된 담벽, 강우규 의사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 있으며 이들 건축물은 군집형태로 묶여있다. 옥사는 목조건물로 'T자형'으로 옥사 중앙에서 사방 전체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곳은 낮에도 햇빛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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