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인물분석

 1  박헌영 인물분석-1
 2  박헌영 인물분석-2
 3  박헌영 인물분석-3
 4  박헌영 인물분석-4
 5  박헌영 인물분석-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박헌영 인물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성장배경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정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아버지 박현주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1889년 흉작 때 박현주가 충청남도 시산 빈농의 딸 이씨를 몇 섬에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박헌영은 나면서부터 봉건적인 이조시대에 차별받던 서자였고, 이 점은 뒷날 박헌영으로 하여금 차별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도록 하여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박현주는 박헌영이 태어나자 신양리 시장거리에 있는 작은 여관을 한 채 사주어 모자가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박헌영은 어린 시절에 서자라고 차별은 받았겠지만 배고픈 적은 없었던 듯 하다. 박헌영은 7-8세 때부터 신양리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2살 되던 해(1912) 신양리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신흥면에 신식교육을 하는 대흥국민학교(4년제 소학교)가 설립되자 그는 2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1915년에 대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상경해 경성보통고등학교(조선인 중등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고보시절, 박헌영의 성격은 퍽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학급주임부에 해마다 기록된 평가는 ‘성질 : 착실, 행장: 중상, 용모: 보통, 복장. 언어: 보통’으로 나타나 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교과목은 영어였는데, 학교에서의 영어수업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서울 YMCA영어강좌에 다니기도 했다. 이 무렵 마음속에 독립사상이 자리잡은 박헌영은 미국으로 유학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1일 민족 전체가 3. 1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바로 눈앞에 둔 때였다. 그도 교정에서, 또 거리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미국 유학의 마음을 굳혔다. 9월에 일본을 거쳐 상해에 무사히 도착했다. 약6개월간 영어를 배운 그는 1921년 4월경 상해의 사회주의 연구소에 드나들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상해에서 여운형과 친교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당시 여운형은 상해에 체재하고 있던 한국청년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상해에서 1921년 9월 박헌영은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했는데 다음해 3월에는 자퇴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귀국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1922년 4월 박헌영은 김만겸으로부터 여비 100원을 받아 김태연, 임원근과 함께 귀국하나 귀국 도중 안동현에서 일경에게 체포당했다. 안동현 재판소에서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은 박헌영은 평양으로 이감되어 1924년 출옥했다.
출옥 후 그는 서울 훈정동 4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계속해서 사회주의에 관한 공부를 했으나 조직적인 연구는 할 수 없었다. 1924년 4월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동맹파업에 동조하여 그는 동아일보사를 나오고 말았다 박헌영은 상해망명 시절에 여성운동가 주세죽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귀국한 뒤 결혼했다. 그러나 후에 부인 주세죽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나서 박헌영은 레나라는 여성을 새부인으로 맞게 된다.
활동사항 및 이념과 사상
박헌영의 출생에서 숙청에 이르는 56년의 삶은 사실상 한반도에서 어쩔 수 없이 불어닥치지 시작한 이데올로기의 열풍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즉 그는 동학농민봉기가 좌절된 이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 말기에 서자로 출생하여 이미 유년시절부터 한반도에 뿌리깊게 자리했던 ‘저항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받았고, 그 이후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적 전체주의, 그리고 해방 후 미. 소군정의 실시와 동시에 본격 유입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중첩적으로 경험한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항 이후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식민지요구에 굴복함으로써 몰락하게 된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환멸과 실망을 강하게 느끼도록 유인했고, 또 이러한 부정적 정치심리는 이후 대체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의 존재에 반항하고 이를 부정하려는 또 다른 혁명심리를 유발시키게 된다. 왕조의 몰락과 이를 방지하지 못한 양반, 지주 등의 무능, 그리고 이러한 상황타개를 위해 봉기했으면서도 새로운 사회구축에 실패하고 마는 동학당 지도부에 대한 실망 이런 역사의 부정적 변수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동조와 순응행위로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에 대한 새로운 항거의 방법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폭발한 러시아혁명은 박헌영에게 조선역사 변환을 위한 긍정적 준거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특히 레닌의 제국주의론에 나타난 ‘세계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 혁명논리’는 그에게 항일을 위한 바람직한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고 이는 곧바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확실한 이론적, 실천적 근거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박헌영의 관계는 이때부터 밀착되며, 그 밀착관계는 숙청 때까지 그를 묶어놓는 사상적 사슬로 남게 된다.
(1) 박헌영의 활동사항
상해망명 시절에 그와 가장 친했던 동지는 임원근과 김태연이었는데 세 사람은 1921년 7월에 고려공산청년동맹을 결성하여 모두 중앙위원이 되었고, 박헌영은 책임비서가 되었다.
코민테른은 1921년 여름부터 극동피압박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상해, 중국 동북지방, 국내, 시베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각 혁명단체 대표를 조선대표로 초청하기로 되어있었다. 이 대회는 처음에 제1차 피압박인민대표자대회라는 명칭으로 소련, 조선, 중국, 일본, 몽고, 자바 등 6개국 대표를 초청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일본이 피압박국이 아니어서 명칭이 극동인민대표자회의로 바뀌었다. 이 대회에 초청된 조선대표단은 23개 단체에서 선출된 53명으로 대회 대의총수 144명의 3분의 1을 넘었다. 주요 인물은 여운형, 이동휘, 박진순, 김규식, 김철훈 오하묵,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등이었고,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상해 고려공산청년동맹의 대표 자격으로 초청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의 기조연설의 요지는 ‘서방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은 지지하지만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은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르크츠크에서 상해로 돌아온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곧바로 국내 잠입 준비에 착수했으나 서울행 열차로 갈아타던 중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옥한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화요회라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써클에 가입하였는데, 화요회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서울 청년회 계통의 ‘서울파’와 격심한 분파투쟁을 벌이면서 형성되었다.
조선기자대회는 1925년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 20여종의 신문, 잡지사에서 693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어 기대이상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건설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는 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에 있는 중국요리집 아서원에서 극비리에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김재봉, 김찬, 김약수, 유진회, 주종건, 조동우, 정운해가, 중앙검사위원으로 윤덕병, 조봉암, 송봉우가 각각 선출되었다. 박헌영은 대회 다음날인 18일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청년총동맹 내에 고려공산청년회 세포조직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각지 청년단체에 대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헌영은 1925년 5월에 고려공산청년회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조봉암을 모스크바로 파견하면서 조봉암에게 모스크바 유학생파견건을 국제공청에 신청하도록 지시했다.
박헌영은 1927년 11월 중순에 두 차례나 감방 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연극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헌영은 정신병으로 생각이 되어져 병보석을 얻어냈고, 11월 2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모스크바로 망명한 박헌영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찍이 활동한 적이 있는 상해로 돌아와 12월 테제에 의거하여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도모했다. 또 그는 1945년 8월 조선해방 직후에 12월 테제를 약간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8월 테제를 발표한다. 12월 테제는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채택된 것으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서 나타난 분파투쟁을 청산하여 이제까지 소부르조아, 인텔리나 학생에 중점을 두었던 당조직방침을 바꾸어 노동자, 농민에 기반을 둔 당을 조직하라는 것이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