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수주 변영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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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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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수주 변영로론
Ⅰ. 작가의 생애
수주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 서울에서 부친 변정상과 모친 강재경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한말의 풍운 가운데서 지조를 지킨 부친의 기개를 이어받은 수주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불결, 불순, 불의에는 거의 혐오를 느낄 정도였다. 1909년 중앙고보의 전신인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앞두고 체조 선생에게 불량 학생이라는 지목을 받자 선생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고 만주로 달아나 중앙학교 3학년에서 퇴학을 당했다. 후에 중앙고보 교사일때 명예 졸업생이 된다.
그 이듬해 중앙기독교 청년회관 영어반을 6개월에 수료하여 그의 뛰어난 재주를 과시했으며 15세 때인 1912년 이홍순과 빠른 결혼을 하고 1914년 영시 를 발표하였다.
1918년에는 중앙고보 영어 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영어 실력이 뛰어나 통역과 번역을 잘해서 21세 때에는 YMCA 구석진 방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해외에 발송하였다. 1920년(22세)에 「폐허」동인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이후 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발자크의 작품 등을 번역해서 발표하였고 1924년에는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을 발간했다. 1927년 이화여전 교수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고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대학에서 2년간 수료하고 1933년 귀국하여「신가정」의 주간 「신동아」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그는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제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그들의 압력으로 회사를 물러나기도 하였다. 일제에 항거하는 그의 저항감이 내면화된 것은 YMCA에서 받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힘이 컸다. 일제말 문화 말살 정책이 우리 문단을 휩쓸던 1940년대에는 작품활동이 저조하고 주로 술로 생활하였는데 이것이 시대적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슬기로운 방패였다고 보았다.
해방 이듬해에 성균관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취임하였고 625사변때에는 해군사관학교 영어 담당 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1949년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53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을 거쳐 1954년에는 국제 펜 클럽 한국 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한국 일보」에 을 실어 “선성모욕”이라는 필화로 성균관대 교수에서 사직했다. 1950년대에는 주로 수필을 많이 썼는데 이 유명하다. 1959년 시집 을 펴내고 건강이 점차 나빠져 1961년 3월 14일 서울의 자기 집에서 향년 61세로 세상을 등졌다. 1981년 3월 그의 20주기를 맞아 새로 발견된 그의 작품까지를 수록하여 이 출간되었다.
Ⅱ.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1.해방이전의 시
1) 1920년대 시경향 - 시대상황과 민족의식
수주 변영로는 동인지 문인들과 당대 시인들이 낭만적이고 주정주의적 시 경향에 빠져 있을 때 서정적인 자유시 형태로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인이다.
「조선마음」을 어디 가 찾을까?
「조선마음」을 어디 가 찾을까?
굴속을 엿볼까, 바다 밑을 뒤져볼까?
참고문헌
※ 참고문헌
-한국근현대문학사, 윤병로, 명문당, 1991.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지식산업사, 2005.
-한국명시해설, 송하선, 국학자료원.
-윤희재의 현대시, 윤희재, 희소, 2008.
-수주 변영로시 연구, 송영목, 한국어문연구학회, 1988.
-수주 변영로 연구, 이선희, 단국대학교 대학원,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