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의 진리를 추구하며 세계를 하나로 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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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원의 진리를 추구하며 세계를 하나로 원불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원의 진리를 추구하며 세계를 하나로 - 원불교
    원불교는 개교 반백년기념 대회 주제로 이러한 표어를 걸어놓았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이 말에는 원불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중요한 부분들이 쏙쏙 숨어있다. 오늘 레포트에서 언급한 제목 그대로 일원의 진리를 추구하는 원불교. 무엇을 의미하던가.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것을 ‘일원상(一圓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살펴본바, 궁극적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둔 듯 하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하듯이, 신성(神性)과 신(神). 이 두 가지 중에 전자에 속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아마도 불교가 불상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리라. 원불교는 결국 본질적인 실재를 가리키는데 형상화되거나 인격화된 부분은 배제하는 경향이 보인다. 아직 깊게 원불교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인격신을 넘어서 있는 실재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선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격신의 개념에 대해 포용자체를 안하는 것인지 아직 질문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여하튼 원불교는 이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진리는 하나이며 세계도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 모든 것을 일체적으로 바라보면서 결국 그것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야 할 이 땅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원불교는 이러한 과정에서 사은사요(四恩四要)의 신앙과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은은 일원상이라는 진리가 구체적으로 현상화하여 나타난 4가지 존재방식이라고 한다. 한편 사요는 사은의 정신으로 가지고 어떻게 윤리를 가지고 인류의 사회를 일원상의 진리로 구현해내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행동강령이다. 그렇다면 3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평천하를 하려고 한다면 먼저 수신(修身)을 해야하므로 달리말하면, 우리의 인격을 닦아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3학은 인격을 닦아나가는데 필요한 3가지 길이라고 판단된다. 이렇게 신앙과 수행의 측면이 서로 어울려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원불교의 핵심적 방향은 어디일까?
    일원상의 진리. 원불교의 핵심을 따라간다면 아마도 나는 그 진리를 나의 몸으로 드러내어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신앙과 그 방향을 안고 진리를 드러낸 그 인격체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수행을 거듭하면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행동강령. 신앙의 방향이 있다. 그것은 세계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일원상의 진리를 구현한 그런세계. 결국 일원상이 지배라는 그 세계를 원불교는 낙원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전 시간에 배웠던 동학의 개벽사상과 매우 비슷한 면이 있다. 최제우식의 ‘시천주’를 자각한 사람들로 이 세계가 가득 차있는 세계. 차별도 없고 서로가 존중하며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또한 동학이 가지고 있었던 후기 모습보다 원불교는 더더욱 역동적인 사회적 움직임을 지향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원불교는 불교에 비해 역동적인 신앙의 행위가 발휘된다.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과 같은 앎과 행함의 일치. 신앙과 행함은 함께 손잡고 출발하는 셈이다. 사회 안의 원불교인들의 역할은 스스로 자력생활을 하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나아가 사회발전에도 공헌을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정말 사회참여적이다. 물론 불교에서도 허무한 무(無)의 세계에 집착하기 보다는 다시 색(色)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하긴 한다. 십우도에서 마지막 ‘입전수수-시장바닥으로 들어옴’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다시 인정하고 긍정하는 의미에서지 원불교에서처럼 사회적 참여까지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원불교에서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물질과 정신을 동일한 가치로 부여한다는 점이다.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았던 헬라적 사유와는 다르게 우리의 몸까지도 우리는 균형있게 서로 돌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큰 범위로 확대되어서도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4대 강령중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이것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균형있게 발전시키자고 하는 의미이다.
    원불교에서도 첫시간부터 계속적인 공통점을 발견하는 부분으로 언급해보자면, 우리 자체에 대한 본질은 우주적으로 신적 본성이며 근원이며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성(性)이요 또한 리(理)라고 할 수 있으며, 동학에서는 천주(天主), 한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창시자인 소태산(小太山)의 창시 및 활동 시기는 조선후기 개화기에 걸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시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동학 농민운동 만큼 인간의 존엄성으로 하여금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은 동학의 입장과 조금 다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동학은 민중들의 의식을 인간 존엄성이라는 새로운 틀로 의식적 영향을 주었던 것에 반해 당시 원불교는 아마도 시대적으로 일본이라는 제국의 무력적 탄압과 억압받는 민족간의 일그러진 평화. 왜곡되어진 세상 질서라는 데에 초점이 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원불교는 기독교적인 초자연적 인격신관에 입각한 내세라든지 하는 구원의 측면은 역시 불교와 다른 만큼 그에 못지 않게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땅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문제를 보고 구원론적 관심(soteological comcern)을 평화와 궁극적 일원상 세계의 완전한 구현을 꿈꾸듯이 개인적으로 나는 현재 기독교도 이러한 부분에 도전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신앙적 그리스도는 강조되었어도 이 땅에 관심을 가지고 저항했던 예수의 모습은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랄까. 원불교의 역동적 힘은 매우 긍정할 만 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데 원불교의 단점이라고 하면 단점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과 세계의 지나친 낙관이라는 것이다.
    낙관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위에 있는 세속적 세계는 회복되어야 할 부분들에 있어서 결코 지나친 낙관으로 보기에는 그러한 입장을 가졌을 때 걸머쥐어야 할 악의문제들에 대하여 과연 어떠한 답을 충분히 가지고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물론 온전한 합일로서의 인격체로 되기까지 방해되는 4가지 요소가 있긴 하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이 생각이 멈춰버릴 만한 해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이 존재한다. 악의문제이다. 기독교도 이 악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마냥 낙관적으로 보는 원불교는 실존적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까지 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전체적으로 원불교는 역시 내가 좋아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걸맞는 능동적인 종교적 신앙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도전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소승불교의 모습과 대승불교의 모습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느낌도 든다. 고타마싯타르타의 ‘법등명자등명’을 생각하면 불상은 없애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대승적 차원에서 보면 자기깨달음을 넘어 자리이타의 행함과 중생구제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 참 흥미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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