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로 써의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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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승려으로써의 한용운
불교인으로의 지향
국맥마저 끊어지는 비운의 1910년 8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선은 강제로 점령되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조선국토가 강점이 된 이후 해인사 주지로 있던 이회광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지배하에 얽어맬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이른바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한 것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조선의 사찰은 전부 일본 조동종의 예속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민족종교의 말살책동은 측량학보다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연히 일어난 만해는 1911년 1월 전남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주도하여 종파를 어지럽힌자(宗門亂賊) 이회광을 몰아내는 데 앞장을 섰다.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박금봉 스님들과 함께 송광사, 범어사 등지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을 분쇄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범어사에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33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임제종 관장서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총독부는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는 내용의 을 반포하였다. 이리하여 30본산이 모두 총독의 수중으로 들어가버리자 만해는 망국의 비애를 안고 국경을 넘어 만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지사 이시영, 김동삼, 박은식, 이동녕 등이 조국광복을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만해는 그들을 방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흥무관학교 등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밀정으로 오해받아 통화현에 있는 굴라재를 넘다가 독립군 청년의 총격을 받았다. 피투성이의 혼수상태 속에서 여인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따라 마을까지 기어온 스님은 수술을 받아 겨우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받으면서 나라 잃은 슬픔이 이 육신의 아픔에야 비교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의 인욕바라밀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훗날 잘못된 일임을 안 청년들이 찾아와 사죄했을 때 그는 담담한 어조로 조선의 혼을 간직한 청년들의 기개를 오히려 칭찬하며 만주의 많은 동포들을 잘 조직하고 교육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 달라고 격려까지 했다.
만해의 기상은 이렇듯 생사를 뛰어넘었다. 고된 시련을 겪어낸, 오히려 고난의 칼날 위에 분연히 일어선 통쾌하고 장엄한 발걸음으로 만해는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우리 불교계는 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다시 백담사로 들어간 만해는 그 유명한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唯神論》을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고 주창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의 유신을 하여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다. 만해는 온 정열을 바쳐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교육문제, 포교문제, 경전의 해석 등을 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의 의지를 천명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불교계의 풍토를 좀먹고 있는 비종교적, 비사회적, 비합리적, 토속적, 미신적인 요소와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해서 불교계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을 확립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다시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인 요청에 부응할 대중 불교 실현의 사명감을 고취, 촉구하였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되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간혹 알지 못한다.
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유신론은 당시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성을 대담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유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제5장부터 제16장까지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직접 부딪치고 있고 또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 논설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첫째 문명의 진보론, 둘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셋째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점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승려교육에 대한 체험적 이론과 확고한 방법론을 피력했다.
그런데 《조선불교유신론》은 한문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한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읽기가 힘들었다. 만해는 다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여 《불교대전 佛敎大典》을 편찬하였다. 《불교대전》은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다. 여기서도 불교 근대화 작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발행되었다.
이 같은 저술활동을 통하여 그는 포교면에서는 열렬한 실천론을 주장하였고, 교리면에서는 선禪, 교敎 일치를 제창했다. 만지풍설 같은 일제 치하의 암흑시대에 만해는 그 많은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 속에서 역사 현실을 외면한 불교, 시대정신이 없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단호히 얘기했다.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중생과 함께 하며 보살정신으로서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실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