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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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시 세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한용운의 생애
2.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는 승려
3. 독립운동과 시인의 길
4. 시에 담긴 정신의 지향
5. 끝없이 이어진 실천의 길
본문내용
1. 한용운의 생애

1879년 8월 29일 :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905년 1월 26일 : 백담사에서 김연곡사에게서 득도
1910년 9월 20일 : "조선 불교 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9년 1월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관련하여 초린, 오세창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삼장을 첨가하다.
(공약삼장 :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은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비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행동강령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독립선언서’보다 ‘공약삼장’을 트집 잡아 민족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
8월 9일 : 경성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유죄판결을 받다.
1920년 : 가을, 감형되어 출옥하다.
1925년 8월 29일 : [님의 침묵] 탈고
1927년 5월 :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히다.
1933년 : 이 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분의 성금으로 서 울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다. 이 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 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935년 4월 9일 :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1939년 : 회갑을 맞아 박광, 이원혁, 장도환, 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청량사 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1944년 6월 29일 :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 1879년 8월 29일 조선 고종때에 충청도 홍주에서 출생
-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
- 6살 때에 한학 공부를 시작, 9살에 한문을 독파했던 뛰어난 신동
- 아버지 한응준의 가정교육으로 인해, 시대의 문제와 역사적 상황에 직면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민족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함.
- 동학군의 패퇴 후 홍주 의병에 참가
- 의병활동이 실패로 끝나자 고향을 떠남.



2.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는 승려

- 1899년 21세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안착하여 승려 생활을 시작
- 절뿐만 아니라 러시아,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체험 후 다시 백담사에 머뭄
- 그의 입산은 종교적 귀의라기보다는 의병에 참가한 전력을 숨기기 위한 일종의 도피
- 방황하는 그를 백담사 주지 연곡스님이 불문에 귀의시킴
- 1905년 연곡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계명은 봉완, 법명이 용운, 법호는 만해로 불교를
수도하는 승려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