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잠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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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잠향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향교란?)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며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고 지방의 민풍(民風)과 예속(禮俗)을 순화하는, 곧 제향과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입니다. 성균관이 대학에 해당하는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이라 할 서당을 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받는 지방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중앙의 사부학당(중·동·서·남학)에 대응됩니다.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과는 기능이나 목적은 같으나 서원이 사학기관임에 반하여 향교는 지방관청에 속한 관학기관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방에까지 유학의 뿌리를 내리는 역할을 했던 향교는 처음부터 이러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향교 이전, 맨 처음에 국도, 즉 나라의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는 학교의 총칭)이 설치된 것은 바로 고려 이후였습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최초의 향학은 서경의 학원(學院)으로 그 뒤 1003년(목종 6)까지는 최소한 3경 10목에 향학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향학을 곧 향교의 전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고,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된 여러 사례들이 나타남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향교의 성립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본다면 향교교육의 실태는 군현제의 강화와 함께 실시되는 조선시대의 향교제도와 비교할 수 없는 저조한 수준입니다.
고려시대에 하향적 교육정책, 즉 교화적 정책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유학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실상은 오히려 고려의 사사로운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육적 성과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향교의 기능과 역할은 조선시대때부터 제대로 시행됩니다.
(향교의 구조)
향교의 구조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기본 구성은 같습니다. 일단 향교도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하급 관학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서무(위패를 모시는 곳)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서자)를 두었습니다.
먼저 향교 건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성전입니다. 이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등 4성을 좌우에 모셔서 합사합니다. 한국에서는 공자를 포함한 5성과 18현(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조헌, 김집, 김인후 등)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내삼문이 있는데, 이 내삼문은 제향 공간의 정문으로, 향교에서는 대성전 앞에 위치해있으며 관아에서는 동헌이나 객사 앞에 설치되어 각 문마다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운데 문은 수령과 사신, 빈객들, 왼쪽 문은 향토의 양반이나 아전, 오른쪽 문은 군관이나 장교, 백성들이 드나들었다.)
대성전이 향교에서 제향 공간을 했다면, 유교 교육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명륜당이란 건물이 있습니다. 보통 명륜당이라고 하면 성균관에 딸려 있는 건물을 칭합니다. 명륜당은 고전 정신을 북돋워 새로운 역사 창조의 바탕을 마련한 곳이며, 국민의 도의정신을 함양하고 사회정의를 뿌리내리게 한 근원이 되었던 곳입니다. 조선 말엽까지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이곳을 통해 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경전 이해도를 측정하는 시험이나 소과(小科)·대과(大科) 시험을 시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