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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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돈가스의 탄생
1. 19세기의 상황, 일본의 근대화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 유신에 의해 봉건적인 막번 체제가 타파되고 근대국가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군국주의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를 이른다. 일본의 근대화는 대내적인 봉건체제의 동요와 대외적인 서구열강의 위협 속에서 국가주도에 의해 극히 단기간에 걸쳐 급속하게 추진되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에도 시대 막부의 대외자세는 쇄국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페리(M. C. Perry)가 이끄는 군함의 위력 앞에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쇄국체제를 고수하던 막부의 외교방침은 붕괴되었다. 이어 1858년에 미국의 총영사 해리스(T. Harris)가 통상을 요구하자 막부는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미일통상조약을 맺고 이어서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 등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천황의 의사를 무시한 조약체결은 존왕양이파들을 자극시켰으며, 막부의 외교에 대한 비난이 극심해지자,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철저하게 탄압하여 정치권력의 분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막부는 이에 격분한 존왕양이파 무사에게 암살되었으며, 오히려 막부의 권위는 크게 저하되고 말았다. 점차 존왕양이파들의 세력은 커졌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1867년에 모든 정무를 천황에게 돌려줄 것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천황 중심 정치의 부활을 선언함과 동시에 신정부 수립에 나섰다. 1868년에 신정부는 에도 시대의 마지막 천황이었던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은 메이지 천황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양이’를 외쳤던 그 전과는 다르게 눈으로 직접 서구열강의 힘을 목격한 그들은 개국의 필요성을 느꼈다. 메이지 천황이 여러 다이묘들과 함께 공의여론을 존중하고 ‘개국화친’한다는 내용을 신에게 맹세하는 5개조 서문을 발표했다.
2. 메이지 유신, 음식 유신
메이지 유신은 음식의 유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정세를 지배하던 메이지 유신은 1200년간 고기를 먹지 않은 일본의 음식문화를 바꾸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538년 불교가 전래되고 675년에 이르러서는 덴무천왕은 국가적으로 살생금지령과 방생령을 내렸다. 그것은 살생을 금지하고 육고기를 금지하는 불교 교의를 기반으로 소, 말, 개, 원숭이, 닭 등의 육식을 금한 것이다. (“소, 말, 개 원숭이, 닭은 먹지 말라, 이 밖의 것은 금하지 않는다. 만일 이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여라”) 이처럼 고기를 먹지 않는 일본의 문화는 12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천왕은 개국과 동시에 1872년(메이지 3년)에 육식을 해금하였다. 이는 위에서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정책이었다. 메이지 천왕은 아마도 서양요리를 보급해 서구의 뛰어난 음식문화 즉, 서구 문명을 섭취 흡수 동화시키려고 한 것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왜소한 체력에 대한 열등감을 불식시키고자 함이다. 그러나 1200년동안이나 육식을 금지하던 일본인의 식탁에 고기를 들여놓기는 쉽지 않았다. 천왕은 공식적이나 자리에서 육고기반찬을 올리는 등 서양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고 이 때 육식정책에 반발하던 세력이 자객을 보낼만큼 반대는 극심하였다.(77.4.조야신문, 양식과 양왜를 궁중에서 몰아내라). 그러나 정부의 지속적인 육식권장의 정책으로 쇠고기를 얇게 썰어 먹는 일본식 전골, 스키야키가 탄생하게 되었다. 처음은 서양음식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던 일본인은 점차 서양음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흡수 동화하였다. 그리하여 메이지 시대 후기가 되자 일양절충요리(양식), 즉 돈가스가 탄생하였다.
3. 돈가스와 커틀릿(가스레쓰), 그리고 단팥빵
서양에 대한 개방이 시작되고, 고작 60년만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양식, 돈가스가 탄생되었다. 돈가스를 영어로 표현하면 간혹 포크커틀릿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포크커틀릿과 돈가스는 엄연히 다른 요리이다. 재료에서부터 조리법까지 전혀 다른 요리이다. 돈가스가 탄생하기까지는 ‘드라마’가 있었다. 쇠고기에서 닭고기, 돼지고기로, 얇은 고기에서 두꺼운 고기로 유럽식의 고운 빵가루에서 일본식의 알갱이가 큰 빵가루로 기름을 두르고 부치는 것에서 기름 속에 넣고 튀기는 딥프라이로 접시에 돈가스만 담던 데서 돈가스에서 서양채소인 양배추채를 곁들이는 형태로 튀긴 고기를 미리 썰어서 접시에 담아 손님에게 내는 것으로 일본식 우스터소스를 듬뿍 끼얹는 것으로 나이프나 포크가 아니라 젓가락을 써서 먹는 것으로 밥과 같이 먹을 수 있는 일식으로 이렇게 바뀌는데 60년이 걸렸다. 이렇게 돈가스가 일본사람모두가 즐기는 요리로 된 것은 바로 밥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 음식문화를 노렸기 때문이다.
돈가스 외에 일양절충의 음식은 바로 단팥빵이다. 단팥과 빵이 결합되기까지의 과정에 앞서 고기외에 ‘밀’이라는 또 다른 역경을 헤쳐 나가야 했다. 일본인이 빵을 처음 본 것은 16세기에 들어선 후의 일이다. 그 이후에도 문헌에서 빵에 대한 기록은 많으나, 밥을 주식으로 하던 일본인에게 빵을 주식으로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빵이 일본인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군사식량이었다. 가벼워서 휴대하기가 편리하고 상할 염려가 없는 빵의 이점에 주목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비타민b1이 다소 부족한 밥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의 육해군이 정백미를 과잉섭취하자 각기병이 발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군사식량으로 빵을 채택한 것이 일화이다. 그 후 야스헤에라는 일본인이 일본인 입맛에 맞는 빵을 개발을 6년 동안을 시도하다 마침내 1874년 단팥빵을 만들어 냈다. 단팥빵은 일본인의 입맛을 사로 잡았고 하루 판매량이 1만 5000개에 다다르기도 했다.
4. 돈가스가 어떻게 일본에서 탄생할 수 있었는가?
돈가스의 탄생의 부재는 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라고 한다. 19세기의 일본의 근대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돈가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돈가스의 탄생을 적은 필자는 돈가스가 일본에서 새로이 탈바꿈하고 일본의 음식으로 떠오른데는 일본의 음식문화와 관련 있다고 말한다. 일본은 1200년동안 고기를 금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각 지방에서 나는 어패류나 채소를 가장 맛있게 조리하는 음식 가공법이 발달했다. 즉 그 땅에서 난 것을 최고의 기술로 조리해 더 맛있게 먹는다는 토산토법의 일본 음식 문화가 발달한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갓포요리가 유명하다.
필자는 에필로그편에서 일본 음식에 대해 일본인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잡식성이 강한 민족이라서 동남아시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처럼 고유의 민족요리가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음식에 대한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전 세계의 음식을 흡수하고 동화해서 향유하는 기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표자는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토산토법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그들의 섬세한 기술력과 재료에 대한 고찰력이 양식이라고 불리는 돈가스를 탄생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뛰어난 기술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토 했다. 그 일화 중 하나가 일본인이 서양에 있는 호텔에 묵고 난 후 모습은 처참했다고 한다. 일본에 돌아가 서양의 물건들은 재현하기 위해 수도꼭지는 물론 모든 물건들이분해되었다고 한다. 돈가스의 탄생이 가치가 있는 것은 서양문화를 모방하여 일본식으로 개조하는 그들의 문화가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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