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형 김현승의 생애와 작품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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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형 김현승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형(茶兄) 김현승론
1. 작가의 생애 및 작품활동
1913년 4월 4일 : 전북 출신으로 목사인 부친 김창국과 모친 양응도 사이에서 부친의 산학 유학지 평양에서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다.
1919년 : 부친이 평양 신학교를 마치고 제주로 성내교회를 거쳐 광주로 오게 되자 그는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평양숭실 중학에 진학하기까지 10년간 광주에서 살다.
1926년 :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다.
1933년 : 위장병의 악화로 2학년에의 진급을 마치고 1년동안 광주에서 휴양하다.
1934년 : 복학을 하지만 학문에는 별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동안 관심을 기울여 왔던 시작에만 몰두하다. 그러던 중 그가 쓴 두 편의 장시가 당시 문과의 인기교수였던 양주동선생의 눈에 띄어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됨으로써 일약 문단의 기린아로 등단하다., ,,
1936년 : 문과 3학년을 수료한 후 졸업학년 진급을 목전에 두고 지병인 위장병이 다시 악화되어 휴양을 목적으로 광주로 귀향. 한편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
1937년 : 교회내의 작은 사건이 신사참배 문제로 과대되어 청년 수십명과 함께 광주 경찰서에 사상범으로 검거되어 물 고문과 재판 등 쓰라리고도 유익한 체험을 치르다.
1938년 : 교회에서 사귀어 다형의 어려움을 위로하던 당시 수피아여학교 음악교사였던 장은순과 결혼하다. 복교하기 위하여 평양을 찾았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운명의 교문이 닫히고 말았으므로 기구한 젊음의 장한을 품고 제 2의 고향인 평양을 돌아서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호남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곧 그만두다.
1946년 : 해방과 함께 광주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모교인 숭일중학교 복교를 이룩하고 초대 교감으로 취임하다.
1951년 : 조선대학교 문리과대학 부교수에 취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