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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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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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당 서정주
1. 미당의 생애
서정주는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속칭 질마재 질마재의 질마는 마을을 넘어서는 고개의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에서 출생하였다. 9살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학 수업을 받으며 전래동화, 민담, 전설, 고전소설 등과 같은 옛날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성장했고 이러한 바탕과 질마재 마을의 유년시절 체험 등이 후일 서정주 문학의 한 원형을 이루게 된다. 미당은 9살때 아버지가 농감(農監) 일을 해 온 지주 김기중의 일가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어 그 대갓집의 문지기로 들어가게 되고 그는 이곳에서 수학, 1929년 15살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즈음 그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영향으로 1930년 광주학생사건 때 주모자가 되어 퇴학당했으며, 이듬해 고향인 고창의 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서도 역시 자퇴를 한다.
그가 만 18세 때쯤 영향을 받은 인물은 니체와 보들레르였는데, 보들레르뿐만 아니라 보들레르 이후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도 받았다. 또한 고호의 여름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고갱의 원시적 그림도 좋아하여 그의 첫 번째 시집 『화사집』(1941)에는 그 영향의 일단을 담기도 했다.
일제 말기의 험난한 시국을 맞아 그 역시 인생관이 변해 “거북이처럼 끈질기고 유유하게 이 난세를 물결을 헤치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쯤 그는 노자나 장자 등의 동양사상에 주목했고 해방 뒤에도 한동안 그의 인생관과 시정신을 지배하였으니, 「국화 옆에서」(1947)는 그의 이러한 시정신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친일시를 썼는데 그가 쓴 친일작품은 시뿐만 아니라 평론수필단편소설르포 등 11편에 이른다.
해방 후 1946년 3월 중앙문화협회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했고 미당은 그 단체에서 시분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다. 그는 1945년 겨울부터 다시 시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일제 말기에 쓴 시들과 해방 뒤에 쓴 시들을 함께 수록해 두 번째 시집 『귀촉도』(1948)를 낸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당은 구상 시인과 더불어 일선부대에 나가 진중 신문을 편집했고, 이 무렵 실어증에 빠져 지내기도 한다. 14후퇴 때 그는 전주로 내려가 전주고등학교 국어교사를 맡았고 이때부터 ‘신라’에 골몰하여 한 동안 신라와 삼국의 역사책을 읽고 지냈으며, 그의 이러한 태도가 시로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 시집 『신라초』(1960)와 『동천』(1968)이다. 그리고 그는 여러 문인 협회와 단체의 요직에 서고 강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남한 문단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후로 미당은 고향 질마재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을 소재로 한 『질마재 신화』(1975년)를 내고, 1977년 세계일주를 하기도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서양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면서 3년간 골몰해 쓴 시집이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이다. 이 시집 역시 우리 전래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후 서정주는 80세가 되도록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다가 2000년 12월 24일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2. 작가의 경향과 주요 작품
서정주의 시는 사회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언어에 대한 실험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의 시가 현대시의 큰 흐름과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초기 시집인 「화사집」에서는 부분적으로 서구적인 미의식이 나타나긴 하지만, ‘신라’를 시적인 소재로 끌어들이면서 그의 시는 현재의 삶과는 무관한 신화적인 시공간으로 건너가 버린다. 그것은 근대적인 시공간의 좌표가 설정되기 이전의 영역이고, 현실적인 가치기준이나 윤리적인 잣대들이 개입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다. 그의 시가 구조를 분석하거나 기호를 해독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대로 주욱 읽히는 것은, 그의 시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분석하기 이전의 직관적인 영역에 속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1) 시인부락과 생명파, 그리고「화사」
서정주는 시작(始作) 초기에 그 나름의 분명한 문학 이념이나 특정한 사상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는 김동리, 오장환, 함형수, 김달진 등과 함께 창간한 동인지 『시인부락』의 후기에서 그 일단을 읽어볼 수 있다.
여기다가 꼭 무슨 빛깔 있는 기치를 달아야만 멋인가 … 중략 … 우리는 우리 부락에 되도록 여러 가지의 과실과 꽃과 이를 즐기는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살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김점용, 『미당서정주 시적 환상과 미의식』, 국학자료원, 2003
김정신, 『서정주 시정신』, 국학자료원, 2002
박호영, 『서정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
오봉옥, 『오봉옥의 서정주 다시 읽기』, 박이정, 2003
오세영, 『한국현대시인연구』, 월인, 2003
윤병로, 『한국근현대문학사』, 명문당, 2003
문혜원,「서정주 시의 주제적 특징에 관한 연구」, 인문과학연구 Vo l. - No.6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