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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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만해는 1879년 8월 29일(양력)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어머니는 온양 방씨다. 만해의 할아버지 영우는 훈율원 첨사, 증조 광후는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사족 계급 출신이었다. 어비지 응준은 충훈부 도사를 지냈으나 만해가 태어날 무렵에는 ‘가난한 집’이란 택호가 있을 만큼 가세가 곤궁하였다. 만해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서상기와 통감을 독파하고 서경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어렸을 적부터 재능이 좋아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고 마을 어른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한학에 정진한 뒤로는 서당의 숙사가 되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가정교육이 만해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아버지는 어린 만해를 불러 놓고 세상 형편과 나라 안팎의 정세를 설명해 주었다. 머리가 명석하였던 만해는 후일 아버지의 교훈을 회고하며 아버지는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 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 걸사의 언행을 가르쳐 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나도 의인,걸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만해는 선친에게서 내외 정세와 의인,걸사들에 관한 훌륭한 정신교육을 받게 되었다. 18세 되던 1896년 홍주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만해는 여기에 참여하여 홍주 호방을 습격, 1000냥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만해에게는 방랑벽이 있었던 것 같다. 1896년 18살 때에 부인과 가족을 두고 표연히 가출하여 방랑의 길을 떠난다. “이 모양으로 산속에 파묻힐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가출한 것이다. 자신의 말처럼 “담뱃대 하나만 들고 그야말로 폐포파립으로 집을 나온” 만해는 서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도중 어느 주막집에서 5~6일간 회의와 번민에 빠져들었다. 만해는 서울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로 갔다. 백담사에서 만해는 불도를 닦기 시작하였다. 백담사의 주지 연곡 스님은 만해를 따뜻하게 맞아 불문에 귀의시켜 주었다. 이듬해인 1905년 1월26일 연곡 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받았다. 만해는 불도에 정진하여 이학암사에게서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배웠다. 불도에 정진하면서 불심이 깊어지고 불법의 무궁한 진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1907~1908년 2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만해는 선수업을,화엄경을 그리고 반야경등 주요 불교 경전 대부분을 배웠다. 어렸을 적부터 두뇌가 우수하였던 만해에게 불교의 교리는 더욱 깊고 넓은 학문의 세계를 열어 주었다.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경전을 공부하고 선 수업을 하면서 장경각에 쌓여 있던 각종 경전을 탐독하였다. 어릴 때부터 담력이 크고 모험심이 강했던 만해는 금강경과 목탁을 담은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세계여행의 장도에 올랐다. 낮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그를 맞은 것은 뜻하지 않은 봉변이었다. 그곳 동포 청년들이 만해를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하여 죽이려 들었다. 일진회는 을사늑약을 지지하면서 일본에 빌붙어 매국 행위를 일삼던 무리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해외에 나섰다가 큰 봉변을 당한 만해는 세계 여행을 포기하고 서둘러 귀국한다. 만해는 일본행을 결심하였다. 1908년 4월이었다. 국내에서는 보안법이 제정되고 정미의병이 일어나고 13도 창의군이 결성되고 이와 같이 일제가 나라를 요절내고 있을 때 만해는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신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마관을 거쳐 동경으로 가서 조동종 종무원을 찾아갔다. 여기서 조동종의 대표인 홍진설삼과 만나 친교를 맺고 그의 주선으로 조동종대학에 입학하여 일본불교를 수학하며 아사다퀀 등과도 교우하였다. 만해는 6개월여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서양에서 유입된 일본의 선진 문물을 지켜보고 유학중이던 최린,고원훈,채기두 등을 만나 교우하였다. 이때 만난 최린과는 뒷말 3.1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같은 물을 지켜마시갔다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갔다독이 되듯이, 이본에 일본 체류는 일부의 비판적인 시적도하였불구하고 정신적,인적 만남으로 항일민족운동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통분을 이기지 못한 가운핰였절망하던 만해는 그해 가을 만주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고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하여 각처에 산재한 독립군 훈련장을 찾아 돌아다니며 애국 청년들을 격려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여러 지역을 돌아보던 중 엉뚱하게 오해를 받아 통화현 굴라재에서 독립군 청년의 총격을 받았다. 이 사건 뒤부터 만해는 체머리를 슬슬 흔드는 불편을 숨질 때까지 겪게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만해는 왜적 치하에서 고통을 받는 동포들과 함께 하고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만해는 1911년 송광사에서 승려 대회를 열어 한일불교동맹조약을 파기시켰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선사찰령을 반포하여 사찰의 주지 임명과 재산관리 권한을 총독이 행사하도록 불교를 장악했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이와 같은 아픔과 질곡 가운데서 배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