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임인식의 생애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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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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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임화(林和) 임인식
1. 작가의 생애와 활동
임화의 본명은 임인식으로 1908년 서울 낙산 밑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난다. 임화라는 필명 외에도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등이 사용된다. 1921년 14살에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이상, 김기림, 윤기정 등과 사귀었고, 1925년 18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다이즘과 마르크시즘 계통의 시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1926년부터 『매일신보』와 『조선지광』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나 습작의 수준에 그친다. 1927년경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고, 『예술운동』창간호에 임화로서는 최초의 프로시에 해당하는 ‘ 曇 - 1927’을 발표하였고 그 뒤로 영화 평론과 영화 제작, 영화의 주연으로도 참여하였으며 카프의 중앙위원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무렵부터로,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쓴 요코하마의 부두》 《네거리의 순이》와 같은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하면서 계급 문학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며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해 박영희의 도움으로 영화공부를 위해 동경으로 가면서 노동 사상 운동을 하던 김두용의 『무산자』라는 출판물에 관여, 무산 예술 운동의 전위(前衛)가 되고자 하며《詩人이여 一步 前進하자》를 발표하여 볼셰비키 소련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를 가리키는 말로 멘셰비키에 대립된 개념이며, 다수파(多數派)라는 뜻으로 과격한 혁명주의자 또는 과격파의 뜻으로도 쓰인다. 민주적 자유주의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무산계급에 의한 폭력적 정권탈취와 체제변혁을 위하여 혁명적 전략을 내세운다. 맨셰비키는 후진국 러시아에 있어야 할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부르주아 좌파와 함께 나아가야 하며 부르주아지와의 협조를 중시하는 것으로서,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제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무장봉기나 프롤레타리아독재 등의 혁명방식을 부정하는 뜻에서 반(反)볼셰비키의 입장을 취했다.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때 이북만, 김남천, 안막 등과 깊이 사귀게 되고, 첫 번재 부인인 이귀례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1931년 귀국하여, 김기진, 박영희와의 이론투쟁을 통하여 조직을 장악, 안막, 김남천, 권환 등과 손을 잡고 구카프계를 전면 후퇴시킨 다음 카프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했다. 그러나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공산당 재건 동맹’을 만들어 지하당 재건을 획책했다 하여 카프 1차 검거 사건이 발생하고, 1934년 카프의 맹원에게 2차 검거의 선풍이 몰아 닥친다.이 때 지병인 폐병으로 연행 도중 쓰러져 구금, 투옥은 면했다.
1935년 카프를 해체하고 김남천, 김기진과 함께 해산계를 종로경찰서에 제출, 경남 마산으로 요양, 지하련과 결혼하게 되고 《해협의 로맨티시즘》,《달밤》등 중기의 임화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발표, 1937년 귀경, 《바다의 찬가》를 지었다. 1938년 ‘시국대응 전조선사상 보국단연맹’이 사상전향자로 불린 민족운동자, 사회주의자등을 엄격하게 감시하면서 어려움을 겪으면서『현해탄』 시집을 출간했다.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세악화로 카프가 해산되고 정치투쟁에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활동은 좀더 문학 내적 방향으로 회귀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신문학사 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반에 기술된 문학사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조선문학’의 존립에 대한 위기감에서 쓴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여러 지면을 통해 부분 부분 연재된 것인데 통칭『신문학사』라 칭한다.
①조선신문학사론서설(조선일보 1935. 10.9~11.13) ②개설신문학사(조선일보 1939. 9.2~11.25) ③신문학사(조선일보 1939. 12.5~12.27) ④조선문학 연구의 일 과제(동아일보 1940. 1.13~1.20) ⑤속신문학사(조선일보 1940. 2.2~5.10)
의 서술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문학사를 이식 문학사라고 규정한 문학사 연구를 통하여 문학 연구의 한계와 진전을 아울러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그의 《개설 신문학사》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최초의 근대문학사가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45년 민족 해방을 맞이하자 그는 곧바로 민족 문학의 재건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조선문학 건설본부’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 후 재편된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해방 정국에서 좌파의 문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문학의 정치 투쟁으로의 임무를 수행했다. 《깃발을 내리자》《三月一日이 온다》, 시집『찬가(讚歌)』를 발행했고 그 후 월북했지만 패전을 남로당계에 전가시키고 일대 숙청극을 벌이기 위한 북로당계의 음모로 1953년 미제국주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이식문학론
임화는 근대문학사 서술에서 이른바 이식문학론을 주장했다. 임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문학이 서국적인 문학 장르를 채용하면서 형성되었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화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 하여 과언이 아닐 만큼 신문학사란 이식문화의 역사이다.’
2. 작품 경향과 변모과정 논문, 신명경, 동아대학교 대학원, 1990, p.6.
굿세든해도 숨을 지우고 리봄에 저녁하날도 식커먹케 짓는데-. 뭇별이 총총한 말업는하날을 보고
버레무리와글와글 울면-
내일이오리라는 西쪽에기운 희미한달
참고문헌
※ 참고자료
ㆍ임화연구, 김윤식, 문학사상사(1989)
ㆍ한국 근현대 문학사, 윤병노, 명문당(2000)
ㆍ임화 시 연구, 정준희,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2002)
ㆍ임화 시 연구, 신명경, 동아대학교 대학원(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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