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렬사 김천일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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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렬사(旌烈祠, Jungryul Shrine)는 1606년(선조 39)에 건립되자마자 사액(賜額)되었다. 처음 나주시 남내동(南內洞)에 건립되었으나 1966년 남산공원(南山公園)으로 옮겨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높이 2m의 김천일 동상(銅像)을 세워 그의 순국을 기리고 있다.여기에는 김천일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1626년(인조 4)에 건립한 정렬사비(旌烈祠碑)가 있다. 이 비(碑)도 사우(祠宇)와 함께 남산공원에 이전되어 보존된다. 비석의 높이는 1.73m이고, 폭은 0.64m로서 비록 비문(碑文)이 많이 마멸된 형편에 있으나 귀부(龜趺)등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면 3간, 옆면 2간의 비각(碑閣)에 보존 관리되는 정열사비는 기념물 48호이다. 김천일(1537~1593)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켜 순국(殉國)한 선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본관(本貫)은 언양(彦陽)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학문으로 유명했던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처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573년(선조 6)에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를거쳐 1578년에 임실(任實) 현감(縣監)을 역임한 후 나주에 있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당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막번(幕藩) 봉건체제(封建體制)의 형성 과정에서 아직도 자기에게 반대하는 다이묘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막대한 해외 무역의 이득을 취하고자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김천일은 고경명(高敬命)과 담양(潭陽)에서 회맹(會盟)한 후 송제민(宋濟民) 양산룡(梁山龍) 양산??(梁山) 등의 호응을 받으면서 창의(倡義)하였다. 이윽고 그는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수원성을 거쳐 강화성에 들어갔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창의사(倡義使)에 임명 받으면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키고, 한강 주변의 왜군 진지(陣地)를 공격하는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1593년 정월에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명나라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이끌고 개성(開城)을 향해 남진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때 김천일이 지세(地勢)를 비롯하여 왜군을 탐지하여 명나라 이여송을 도왔다. 이러한 합동작전으로 왜군이 남으로 퇴각하자 그는 왜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는 조정 명령을 받고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사실 진주성 혈전은 상당한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당시 호남지방은 그 전략적 위치가 컸을 뿐만 아니라 왜군(倭軍)에게 유린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호남은 곡창지대로서 군량보급기지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가 회복의 근기’로 인식되고 있었다. 사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의 남해 제해권(制海權)의 장악은 왜군의 수륙작전을 봉쇄하는데 그치지 않고 호남의 곡창지대를 방어한 의의가 있었다. 특히 많은 의병들이 장렬히 죽어간 두 차례의 금산전투도 호남을 방어하기 위한 대 혈전 이었다. 이 같은 토대 위에서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이루어져 본격적인 북상(北上)이 수행될 수 있었다. 또한 진주성 혈전도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김천일은 ‘지금의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고, 진주는 호남과 밀접한 곳으로 순치(脣齒)의 관계인데, 만약 진주를 버린다면 그 적화가 호남에 미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같은 인식 위에서 전개된 진주성 혈전에는 그와 더불어 절도사(節度使) 최경회 황진(黃進) 고종후(高從厚) 장윤(張允) 등이 사수(死守)를 맹서하며 참전하였다. 이들은 왜군의 대군을 맞아 혈전을 벌인 끝에 대부분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도 화살을 다 쏘고, 창검이 부러지고, 끝내 대나무 창으로 응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