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큐정전과 광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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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큐정전과 광인일기
루쉰 [魯迅(노신), 1881.9.25~1936.10.19]
중국의 작가. 사상가인 루쉰은 1881년 예부터 절경으로 소문난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주수인. 필명인 루쉰은 투르게네프의 루딘을 모방한 것이었다. 당시 이름만 대도 다 알아주던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온 가족과 하인들의 애지중지 속에서 자랐다. 출신배경이 이런 루쉰이 급진적인 혁명사상에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릴 적부터 글 잘하는 수재로 소문난 루쉰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는 이때 받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모두 사망,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다. 훗날 루쉰은 "나는 그때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진면목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그 당시의 충격을 회고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 소흥은 실패로 끝난 두 혁명인 태평천국의 난(1861)과 신해혁명의 중심 영향권에 들었고, 당시 중국대륙을 유린한 외세진출의 통로 앞에 늘 놓여 있었다. 급진 혁명사상에 눈뜬 루쉰이 신학문을 배워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길을 오른 것은 스무 살인 1900년. 당시 우매한 중국 한의술 때문에 부친을 잃었다고 생각한 루쉰은 서양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구국을 생각했다. 그러나 세균학 시간에 우연히 본 러일전쟁 시사영화에서 한 중국인이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 중국군중을 본 뒤, 그는 민중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족적 자각을 시키는 일, 즉 정신적 질병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의학을 중단하고 문학으로 전향했다. 그 후 신문화운동에 참여하여 동경에서 [신생]을 발간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동생 주작인과 공동으로 성외소설집을 번역했다. 성외소설이란 당시 외국(유럽) 소설을 의미한다. 이대 그는 유럽의 약소민족의 문학, 슬라브 민족의 저항시, 니체 철학에 심취했다. 잠시 귀향하여 인습적인 결혼을 했으나, 그것은 그에게 큰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북경에 가서 채원배에 초청되어 교육부직원으로 일하면서 처녀작 [광인일기(1918)]를 썼다. 잡지 [신청년]에서 활동하는 한편 백화운동. 문학혁명에 참가했으며, 북경대학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경사 도서관장을 겸했다. [광인일기]는 낡은 봉건왕조를 청산하려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중국 신문예를 탄생시키는 출발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발표된 [아Q정전]은 중국 국민적 성격의 전형을 풍자한 소설로서, 중국이 역사적으로 계승하여온 중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사는 정신승리법과 우매성, 약점을 아Q에 집약하여 냉철하게 묘사한다. 찬반이 일어나지만 반봉건의 신문화운동을 기원하는 젊은 진보파들에 의해 옹호되었으며, 5. 4운동, 비공 운동의 기수로 앞장서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청년지도기관인 주명사를 설립하여 계속 문학혁명에 앞장섰으며, 그가 관계한 여자사범대학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그에 동참, 당시 단기서 정부의 탄압(체포령)을 피해 북경을 탈출하여 교직을 광동 중산대학으로 옮겼다. 1927년 4월 국공 분열 후 다시 국민당의 탄압이 시작되자 불안한 사회정세를 피해 상해조게에 숨어서 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 여름에는 뉴욕에서 열린 노동자문화 연합대회의 중국 측 명예주석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그는 북경대학 근무 당시의 제자 허광평과의 동거로 중국의 인습을 깨뜨렸다. 그는 중국작가동맹 좌익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극좌(창조사. 태양사)와 대립하여 참된 프롤레타리아 문학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초기의 소설에서 차츰 평론. 수필로 옮겨갔고, 이른바 쫓겨 다니면서 발바닥으로 쓰는 시기를 맞았다. 우익 양실추. 두형등의 예술 지상주의를 계승한 임어당의 공격을 받았다. 중일전쟁 발발의 전년 1936년, 폐결핵과 천식이 악화되어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만국 빈의관에 옮겨 1만 명의 조객과 7 천의 옹위를 받으면서 만국공묘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비석에는 민족혼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광인일기(1918)
1918년 5월 《신청년(新靑年)》에 발표되었다. 피해망상광(被害妄想狂)의 일기 형식을 빌려, 주위 사람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줄거리로 하여, 중국의 낡은 사회, 그 중에서도 가족제도와 그것을 지탱하는 유교도덕의 위선과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까지 삼켜버리는 구사회의 역사적 중압에 대한 인식과, 그 중압을 허물어 버리려는 소망을, 어린이를 구하라는 호소 속에 담은 작품이다.
느낀 점
광인일기’는 중국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식인풍습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는 평가가 거의 정설이다. 그러나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본 결과 ‘광인일기’에서 식인풍습을 하나의 상징이나 비유로 쓰긴 했지만, 곳곳에 나오는 식인풍습에 대한 이야기들(좌전에 나오는 아이 바꿔 먹기, 자신의 아이를 쪄서 바친 조리사, 쉬시린의 시체를 먹은 사람)이 사실을 기반으로 했고, 그 당시 중국에서 식인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식인풍습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루쉰의 다른 소설 ‘약’에도 식인풍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구조적 병폐에 대한 비판보다도 식인풍습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더 강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물론 식인풍습은 중국사회의 구조적 병폐 중에 속한다.)
아Q정전(1921~1923)
아큐는 이름도 성도 없이 조씨 댁에 얹혀살면서 조씨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로 떠돌이패의 한 사람이다. 전형적 노예근성을 지닌 무지몽매한 쿨리(중국 하층민, coolie, 중국이나 인도의 하층 육체노동자, 막일꾼)의 상징이다. 아큐에 대해서는 이름과 출신지, 그리고 행적에 관해서도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는 집도 없이 웨이장에 있는 동구 밖 사당에서 기거하고 있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는 일과는 달리 매우 자존심(自尊心)이 강한 인물이어서, 마을사람들이 그를 건드려도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일관한다. 그의 신체적인 결함은 머리가 조금 벗겨진 대머리라는 것이고, 마을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결점에 대하서 언급해도, 노름에서 많은 돈을 잃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큐는 매사에 자신 있게 처신했고 따라서 자연히 승리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아큐가 유명해진 것은 마을의 세도가 자오씨의 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난 뒤부터이다. 그에게는 매우 싫어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거지인 왕과 첸, 그리고 지주인 첸가(家)의 아들이 그들이다. 특히 첸가의 아들은 서양식 학교와 일본유학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 듯했고, 변발도 잘라버렸기 때문에 아큐는 그를 양놈이라고 욕했다. 그런데 아큐의 욕이 그의 귀에 들어가 화가 난 첸의 아들이 지팡이로 아큐를 두들겨 팬 것이다.
아큐는 장난도 몹시 즐겼다. 한번은 그가 비구니를 놀리려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는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큐가 여자를 안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아큐의 변화는 자오씨의 집에 쌀을 찧으러 갔을 때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자오씨의 집에서 일하는 젊은 과부 우마에게 수작을 걸어, 우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자오씨는 아큐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고, 결국 아큐는 금 2천 문과 이불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그런 아큐는 우마와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을 여자들은 아큐만 보아도 도망갔고, 남자들은 아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외상술도 주지 않았다. 전에는 친하던 사당당지기도 아큐를 보면 언짢아하고, 더구나 그를 고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가 다시 웨이장으로 돌아온 것은 중추절 직후였는데, 그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 산 옷에다 모든 거래를 현찰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신기하고 새로운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여자들은 아큐가 가지고 온 물건들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은근히 만나고 싶어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큐가 도둑이의 앞잡이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러한 흥미는 자연히 시들해지고 말았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해, 9월 14일에 뜸으로 갑판을 위장한 파이 어른의 배가 자오씨의 선착장에 닿게 되었다. 혁명당을 피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아큐는 혁명당을 알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혁명당에 놀라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아큐는 혁명당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4, 5일이 자나자 민심은 가라앉고 혁명당이 온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안심하게 된다. 아큐가 혁명당에 가입하기 위해 첸가의 아들을 찾아간 날 밤에 자오씨의 집이 습격을 당했다. 아큐는 자신을 내쫓은 자오씨에 대해서 감정이 있었고, 마을사람들도 자오씨의 집이 습격당한 것을 은근히 속으로는 기뻐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두려움도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아큐가 체포되었는데 누가 누명을 씌웠는지 몰라도 아큐가 자오씨의 집을 습격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다. 아큐는 생전 처음 붓을 들고, 서명하는 대신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군중 속에 서 있는 우마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큐는 무수한 인파들의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을 받았다.
아Q에서 Q의 의미
"아Q" 의 Q 는 "변발" (영어로 Queue, 또한 Q 의 글자모양도 변발을 한 사람의 머리 모양을 암시) 을 의미한다. 즉, 유교와 같은 중국의 구시대적 전통사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느낀 점
아Q정전은 사전 정보가 없어도 꽤 재밌게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중국인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루쉰은 아큐(중국인의 전형적 특징)의 정신승리법을 끔찍하게 싫어했다고 한다. 소설에는 정신승리법에 대한 조롱과 풍자, 혐오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물론 나도 소설을 읽으면서 아큐의 정신승리법을 비웃었다. 하지만 저런 수준까지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약간 들었다.(어디까지나 약간이다.) 어쨌든 루쉰은 이 소설을 중국 사람들이 각성하길 바라며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고 각성한 것이 아니라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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