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 각오의 신앙인 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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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사 각오의 신앙인 주기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사각오의 신앙인 주기철
소양 주기철 목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신앙인이자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수호 운동을 선도하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학생 주기철과 민족 정신
주기철 목사는 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게 되고 이 강연에 깊은 감동을 받아 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진학한 곳에서 선각자들의 지도아래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 정신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받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것이 민족과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목사가 되기까지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를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지만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던 중 주기철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1930년3월30일자에서 “부산진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 부흥회 이적이 나타났다”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거기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회 도중 그는 자신을 압도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심을 느끼면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회개와 헌신의 마음으로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925년 경남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26년 1원 1일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신사 참배 거부 운동과 일사각오의 신앙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노골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으로 조선인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조선인을 신도 의식에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 하였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책략에 맞서 주기철 목사는 이미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에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가결케 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선교 50주년 기념 부흥 사경회에서 행한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과 한국 교회 신앙의 순결을 위한 신앙 정신이 어떠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투옥과 순교
1938년2월8일 산정현교회를 새로이 건축하고 헌당식을 하는 당일,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를 평양 경찰서에 검속하였습니다. 신사 참배 반대를 외치는 주 목사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투옥생활을 하면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습니다. 주 목사는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계속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1940년2월 잠시 석방되어 산정현교회로 돌아온 주 목사는 강단에 서서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첫째 ,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투철한 신앙과 민족 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평양형무소에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운명을 다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