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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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
일제강점기시대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독립에 힘쓴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중에 이번 과제를 통해 독립운동가 이기도하면서 기독교인인 주기철 목사에 대해서 책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책을 통해 알아본 주기철 목사에 대해 서술하고 그에 대한 저의 소감에 대해 서술해 보겠습니다. 우선 본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히 서술하자면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신앙인이자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수호 운동을 선도하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학생 주기철과 민족정신
주기철(1897-1944)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에서 주현성 장로의 4남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이었던 시절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그 강연에 깊은 감동을 받아 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는 동기가 되어 진학하였습니다. 오산 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이승훈 장로 등 선각자들의 지도 아래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받았고 오산학교에 다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것이 민족과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목사가 되기까지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남강과 고당의 권유에 따라 헐벗고 굶주리는 민족을 배불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채 1년도 지나지 못해 눈병이 악화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고향인 웅천으로 돌아와 웅천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며 야학과 청년 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당시 일제는 한국 청년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총독부의 세입 증대를 위하여 여러 계략을 만들었으나 한국 교회는 이런 계략에 맞섰고 그에 따라 한국 교회는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주기철은 동아일보의 한 기사를 본 것을 계기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자신은 너무도 나약한 피조물이요 죄인일 뿐이라는 깨달음이었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나서려는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인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불의와 악의 세력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와 헌신의 마음으로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1925년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6년 1월 1일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주기철 목사는 1936년 여름 평양 산정현교회로 일제의 탄압에서 평양과 기독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초빙을 받았습니다.
신사 참배 거부 운동과 일사각오의 신앙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억압적인 방법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정책 중 하나인 신사 참배는 조선인들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폭압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가 우상 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뿐 아니라 한민족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계책임을 알고 산발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항에 일제는 탄압과 강요를 했고 이를 이기지 못한 많은 사람들과 교회가 신사 참배 강요에 굴하게 되면서 결국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에 가결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책략에 맞서 주기철 목사는 이미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에 신사 참배 거부 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가결케 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선교 50주년 기념 부흥사경회에서 행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는 요한복음 11장 16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로, 한국 교회와 기독신자들에게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어나 일제의 압박에 항거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