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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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 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
1.일사각오의 신앙심
소양 주기철 목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신앙인이자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수호 운동을 선도하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를 위하여 일제는 조선인을 신도 의식에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 시켰습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신사참배가 우상 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계책임을 알고 산발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구속하고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폐쇄하였으며, 신사 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들을 내세워 교회마다 다니며 찬성 설득 강연을 하게 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회유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내 1938년 9월 한국 장로교회 총회까지 신사 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사 참배 가결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였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책략에 맞서 주기철 목사는 이미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에 신사 참배 거부 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가결케 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선교 50주년 기넘 부흥사경회에서 행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와, 같은 해 금강산에서 열렸던 목사 수양회에서 한 ‘예언자의 권위’라는 설교에서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과 한국 교회 신앙의 순결을 위한 신앙 정신이 어떠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일사각오’ 설교는 요한 복음 11장 16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로, 그 대지는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의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였습니다.
2. 목사가 되기까지
1916년 19세에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남강과 고당의 권유에 굶주린 민족을 배불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채 1년도 지나지 못해 눈병이 악화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고향인 웅천으로 돌아와 웅천 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며 지냈습니다.
이때 일본은 아편재배를 허용하고, 담배 생산을 장려하는 등 한국 청년들의 정신을 흐리게 해 놓았습니다. 한국교회는 금연을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이광수의 변질로 주기철은 한국교회와 민족에 대해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되면서 신학에 대해 공부하게 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그것은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 집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은 너무나 나약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자주 독립을 실현하는 것이 어떤 능력보다도 더 큰 하나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는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초량교회에 부임하면서 목회를 시작합니다. 이후 주기철 목사는 1936년 여름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 받습니다. 이후 산정현 교회는 그의 순교적 항일 투쟁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3. 투옥과 순교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는 주 목사의 입을 막기위해서 평양 경찰은 주기철 목사를 경찰에 검속하였습니다. 순교하기까지 5차례 걸처 총 5년 4개월간 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관련된 투옥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살인적인 일본의 고문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지막지한 고문과 고통 가운데서도 주목사는 찬송하면서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하며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계속 일제에 항거합니다.
1940년 2월 잠시 석방되어서 주 목사는 늘 하던 5가지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고 1944년 4월 21일 9시 30분경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