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융화와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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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융화와 분쟁
터키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에까지 약 5000년의 역사와 문화가 남아있는 동서양 문명 융화의 용광로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만큼 터키는 분쟁이나 소외라는 주제보다는 융화라는 이미지가 보다 어울리는 나라라고 생각된다. 그 예로, 음식 문화가 있는데 본래 터키인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유목민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음식은 육류가 주를 이루었으며 오늘날 몽골 요리처럼 향신료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서 비롯된 음식으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케밥이 있는데, 초창기의 케밥은 단순히 고기를 구워 먹는 것에 불과했으나 터키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고 나서 주변문화를 수용하다보니 지금과 같이 조리방식만 1000여 가지에 달하는 복잡한 요리가 되었다.
터키 요리의 전성기는 오스만 제국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터키 요리는 제국 내 거주하던 민족들의 다양한 조리법을 흡수했는데, 가령 페르시아 인으로부터는 향신료와 세련된 조리법을, 그리스인으로부터는 다양한 야채 요리와 생선 요리법을, 그리고 아랍인으로부터는 과자 만드는 법을 흡수했다. 18세기 이후로는 황제를 중심으로 서양문물 개화를 통해 프랑스 요리의 영향도 받게 되어 장식을 더해 화려한 맛까지 갖추게 되었다. 얼핏보면 그리스 요리와 큰 차이가 없어보이는 터키 요리가 갖는 최대의 특징은 페르시아 인으로부터 받은 향신료의 사용법이다. 터키 요리는 인도 요리 만큼은 아니나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하는데, 전통적으로 동서교역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물이 유입된 영향으로 본다. 오레가노, 파슬리, 월계수 잎, 넛맥, 큐민, 후추, 고추를 비롯해 듣도보도 못한 향신료까지 사용하곤 한다.
터키의 음식 문화가 융화의 이미지로 떠오른 이유는 ‘터키에는 이방인이 없다.’라는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장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간에 교류가 많아왔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 간의 교류에서 음식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과 맞물려 터키의 음식이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터키과자 터키쉬 딜라이트 >
이미지 단어 : 케밥 / 터키쉬 딜라이트(터키과자)
하지만 터키는 융화의 면도 많은 만큼 분쟁 역시 존재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터키가 얽혀있는 ‘쿠르드 난민’ 문제로, 3국 국경지대에 분포해 있는 쿠르드 난민들로 인한 3국 분쟁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다. 쿠르드 족은 자기의 민족 국가를 가지지 못한 세계 최대의 민족 그룹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쿠르디스탄이란 평균 고도 해발 3500미터의 스텝과 같은 고원 산악지대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수원지가 되는 거대한 반호수 북쪽 평원지역과 이라크의 북부의 유전지대와 비옥한 땅으로 인해 강대국의 분할 통치의 대상이 됨으로써 쿠르드의 독립이 지금까지 방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쿠르드 민족이 크게 이란, 이라크, 터키의 3개국으로 편입된 이후 쿠르드 독립 운동의 양상도 각각 이들 중앙정부의 정책에 의해 달리 나타나게 되었고, 쿠르드 인들은 현재 독립 운동을 다각적으로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 현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라크의 쿠르드 족을 대표적으로 살펴보면,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민족의 주권을 가장 많이 인정받은 쿠르드족 집단으로, 그들은 1970년 정부와의 자치 협상에서 쿠르드어 교육과 교육어로서의 쿠르드어 사용이 허용되었으며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지역에서 쿠르드족이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산유지인 키룩쿡이 포함되지 않은 등 일종의 회유정책에 불과했다. 이러한 회유정책에도 쿠르드족의 민족저항운동이 제압되지 않자 1975년이후 쿠르드 족에대한 강경정책을 취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란의 이라크 공격을 묵인해주면서 이라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란에게 쿠르드반군을 원조하도록 부추기자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은 1987년에서 1989년 사이 안팔 작전이란 쿠르디스탄 초토화 작전에나서 4000개 이상의 쿠르드족 촌락을 초토화하였으며 수십만 명을 학살하였다. 특히 이 안팔 작전 기간 중 1988년 3월에 사담 후세인은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할랍자 마을 전 주민 5000여명을 5분 안에 즉사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은 전체 8회에 걸쳐 진행된 안팔 작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1988년 1년간 진행된 안팔 작전에서만 쿠르드족 민간인이 10만 명 이상 죽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1990년 걸프전을 계기로 1991년 대규모 쿠르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다시 이라크의 강경진압으로 250만명의 난민이 발생되었다. 이때의 난민은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고 대부분은 현재까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지대 난민촌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걸프전이후 북위 36도 이북의 쿠르디스탄지역은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되어 이 지역 쿠르드인들은 서방의 도움으로 자치 정부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UN의 대이라크 무역제재조치로 쿠르드족의 형편은 이라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쿠르드 족이 3000만 명을 차지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있을 때, 핍박받는 쿠르드 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터키는 기본적으로 융화라는 테마로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쿠르드 족과 관련된 분쟁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이미지 단어 : 쿠르드 족
출처 : https://mirror.enha.kr/wiki/%ED%84%B0%ED%82%A4%20%EC%9A%94%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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