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개별화를 이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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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존재의 개별화를 이룬 사람
융의 모형을 3단어로 표현해보기!
세 번째 인물로 카를 융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앞서 선택한 로저스와 올포트가 건강한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융은 무의식의 내면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데 흥미를 갖게 됐다. 하지만 다른 심리학자들에 비해 융의 이론에 더 깊이 파고들었지만 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융의 모형을 3단어로 언급해 보자면 ①무의식 세계 강조 ②개별화 과정 ③원형 이다.
1) 무의식 세계 강조
카를 융(Carl G. Jung, 1875~1961)은 스위스 북동부 케스빌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신과 의사였던 융은 수많은 환자의 심리분석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정신치료법을 확립하였다. 당시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연구를 이해하고 1907년 이후에는 공동 작업을 해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인지되었지만 프로이트와의 견해 차이로 5년 만에 결별했다.
그 후 프로이트는 38세 되던 해 자신이 점점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연구도 할 수 없어 대학교수직도 포기하고 자신을 찾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융은 두 살 때부터 의식의 층을 뚫고 솟아오르는 무의식의 신비한 체험을 경험한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사람을 잡아먹는 것’ 등 뭐라 해석할 수 없는 상징적 형태로 치장된 꿈을 자주 꾸었는데, 융은 그것을 자기를 이해하는 열쇠로 생각했다. 융은 꿈에서 본 길쭉하고 검은 형상을 조각해서 집 정원에 세워두었는데 그 조각이 아프리카 원주민에게서 발견된 것과 똑같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융의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알려진 ‘집단무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나도 내 안의 본능과 잠재의식 속에 표현하고 싶은 내재화된 욕구를 억누르면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나는 진정 내가 아님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아마도 무의식 속의 나를 간절히 꺼내고 싶은 간절함이 아닐까? 융처럼 무의식속의 나와 접촉해보고 싶기도 하다.
2) 개별화 과정
융은 ‘직면’을 통한 개인의 심리적 발달과정을 ‘개별화’(individuation)라고 불렀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개별화 과정은 의식(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축을 세우는 작업이다. 무의식을 강조한 융이지만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의식을 의식이 감독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융화되어 모두 자유롭게 발달될 때 건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의식은 외향성과 내향성의 두가지 태도로 나누어지며 또 이것은 이성적 기능(사고, 감정)과 비이성적 기능(감각, 직관) 네 가지로 나누어져 여덟 가지의 심리 유형을 형성하게 된다.
나를 포함하여 인간에게는 여러 유형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특정 상황에 따라 어느 한가지로 표현된다. 다양한 성격을 경험하면서 이제까지 “과연 내 성격이 뭐지?” 라는 의문을 융이 어느 정도 해결해준것 같다.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성격과 무의식에 잠재된 성격이 늘 상존한다는 것이다.
3) 원형
융은 고대와 현대에 이르는 유사한 경험과 주제의 일치성이 우리에게 심상으로 확실하게 표현되는데 이를 원형(archetype)이라고 했다. 융은 원형적 꿈은 강렬한 정서와 관련 있으며 인생의 위기나 변화의 시기에 더욱 자주 꾸게 된다고 말했다. 융은 전 세계의 인류는 무의식중에 공통된 원형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많은 원형이 존재하지만 대표적으로 페르소나(Persona:외부 세계가 요구하는 데로 보여주는 모습), 아니마(Anima: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 아니무스(Animus: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 그림자(Shadow:자아의 그늘진 어두운 면), 자기(self:성격의 통일성)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형은 자기이며 융은 그것을 생의 궁극적 목표로 생각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양립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페르소나는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역할로 우리는 그 가면을 쓰고 연기하지만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멋진 페르소나-친절한, 유능한, 상냥한-를 가진 사람들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가면을 벗어야 할 상황에서조차 페르소나를 벗을 줄 모른다. 하지만 중년에 이르면 우리는 그 ‘가짜’에 한계를 느끼고 혼란을 겪는다. 38세 방황했던 융의 모습처럼 참된 자신의 모습,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중년의 깊은 고뇌와 방황에서 파괴성을 띤 채 떠오르는 게, 페르소나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다. 그림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돌보지 않았던, 부정했던 내 안의 ‘미지의 타자’다. 융은 그림자를 ‘직면’할 수 있다면 그 파괴성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그림자를 인생의 후반부에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실마리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