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주의의 대두 15세기는 왕성한 지성의 발효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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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합리주의의 대두
1. 15세기는 왕성한 지성의 발효 시대였다.
신진세력인 합리주의는 결과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인간이성은 권위에 대하여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스스로의 자유를 크게 외쳤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교회 안에 있는 두 인물이 그러한 경향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물은 이탈리아 문예 부흥기의 사람 나폴리 왕의 비서인 로렌조 발라이다. 1440년의 그의 저작인 「잘못 알고 있는 콘스탄틴 대제의 위 신임장에 대하여」는 그로 하여금 몹시 난처한 입장에 서게 하였으므로 로마의 노여움을 예측하여 미리 피해서 바르셀로나에 피신하였다. 수세기 동안 교황청은 ‘콘스탄틴 대제의 기증’이라고 하는 법적 근거를 함부로 조작하고 그것에 의존하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발라가 그것의 허위성을 증명해 버렸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계속해서 문헌 고증을 하였다. 그는 유세비우스 같은 교회 역사가들이 진정한 것으로 믿어 온 ‘에뎃사 왕 아브갈’에게 보낸 그리스도의 편지가 가짜임을 발견하였다. 그는 불가타의 라틴어의 문체를 비판하였으며 끝내 사도신경의 권위도 의심하였다.
둘째 인물은 영국의 성 아사프와 치체스터의 사교인 페코크이다. 그는 이성의 강한 요구를 느꼈다. 전 세계 교회의 결정도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성서 해석 자체도 인간 이성의 조명 아래 이루어져야만 한다. 페코크가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생각된 때도 있었으니 그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당하게만 이해한다면 교회의 신앙은 완전히 합리성을 가진 것이라고 믿은 대담한 호교론자가 페코크였다.
2. 16세기에 들어와 고대 문학과 근대적 지성주의의 영향은 더욱 현저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주지주의의 새로운 형이었다. 스콜라주의는 언어학의 새로운 통찰과 비교할 때 빛을 잃은 것 같았다. 교부들을 연구함으로써 얻은 소득은 전통 안에 들어오지 못한 광범위한 기독교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성 바울 교회의 주사제로 부임하게 된 존 콜렛에게 에라스무스는 아래와 같이 편지했다.
신학은 모든 학문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착한 사람이나 어진 사람은 신학에서 물러나고 있고 그 분야를 스스로 전지자라고 생각하는 어리석고도 불결한 사람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귀하는 그러한 사람들과 투쟁하였습니다. 귀하는 사도들의 기독교를 회복시키며, 부상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일소하려고 노력하고 계십니다.
에라스무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고 보았으나 콜렛은 “만일에 그가 교만한 우자가 아니었던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대하여 대담하게 법칙을 정하지 않았을 것이며, 만일 그의 마음까지 세속물이 아니었던들 그렇게 엉터리 철학으로 기독교를 그다지 오염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콜렛보다 에라스무스는 더 전통주의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의 새 역본을 내놓을 때 당시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주석을 달았으며 성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콜렛은 성서의 자의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에라스무스나 콜렛이나 교회의 종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교회의 개혁자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3. 17세기는 과거보다 성서의 가치를 낮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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