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 일록中궁녀 고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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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일록』中 궁녀 고대수
1.문화 원형 사례:
갑신정변은 근대 자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일으킨 혁명이었다. 김옥균은 아시아의 영국을 꿈꾸는 일본에 대항하여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기 위해 근대화를 내걸었다. 그는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신분제를 타파하고자 했으며 자주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친청파(親淸波) 민씨 척족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김옥균은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의 무력과 고종의 권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분명한 약속을 얻어 내는 일과 함께 고종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특히 고종을 장악하려면 고종의 동정을 환하게 알아야 했다. 그러려면 고종의 측근 인물 중에서 동조자를 포섭하거나 자신의 동조자를 고종의 측근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김옥균은 궁중의 내시를 포섭하는 한편, 자신의 동조자를 고종의 측근 궁녀로 들여보냈다. 김옥균의 동조자로 입궁한 궁녀가 고대수(高大嫂)였다.
원래 고대수는『수호지』에 나오는 여장부의 이름이다.『수호지』의 고대수는 사내 20여 명을 거뜬히 해결하는 양산박의 108두령 중 하나로, 외부의 정보 수집을 담당했다.
고대수가 김옥균에게 포섭된 것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고대수와 김옥균은 10여 년에 걸쳐 혁명의 필요성을 공감한 혁명 동지라 할 만하다.
고대수의 본명은 이우석(李禹石)이다. 이우석은『수호지』의 고대수처럼 덩치도 크고 기운이 세어 남자 대여섯은 너끈히 감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옥균 주위의 개화당 사람들이 이우석을『수호지』의 여장부인 고대수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당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 사람들이『수호지』의 108두령 같은 영웅심으로 충만해 있었음을 알려 주기도 한다. 아울러 고대수가 실제로 정보 수집 업무를 맡았음을 보여 준다.
이우석, 즉 고대수가 궁녀로 들어간 것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당시 명성왕후 민씨의 나인이었던 송씨의 연줄로 입궁했던 것이다.
덩치 크고 기운 센 서른일곱 살의 고대수는 상궁이나 나인 같은 정식궁녀는 아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너무 많은 데다 용모도 단정하지 못했다.
기운이 센데 나이는 들고 용모도 단정하지 못한 여성이 궁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수리가 적격이다. 무수리라야 출퇴근도 가능하다. 궁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첩자로서는 무수리가 제격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무수리 중에서도 민비가 무당을 불러 벌이는 굿판에서 액막이 역할을 맡았으며 궁중의 온갖 허드렛일을 담당했다.
궁중의 무수리로 입궁했다면 고대수는 매우 비천한 신분이었을 것이다. 고대수가 신분 타파를 주창하는 김옥균에게 동조한 이유도 이런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명성왕후 민씨는 고대수를 매우 신임했다고 한다. 힘 좋고 못생긴 고대수를 왜 신임했을까? 당시의 불안한 상황을 고려할 때 고대수를 듬직한 여자 호위병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또한 못생겼기에 고종의 외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김옥균은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고대수를 입궁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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